한국희곡

해윤 '단 한번과 두 번'

clint 2023. 9. 1. 17:28

 

 

이 작품은 시간을 다룬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절대시간의 틀을 깬 상대시간 속에서 과거는 더 이상 기존의 미래가 거쳐 온 과거가 아니다.

미래 역시 과거를 지나온 미래가 아니며 언제나 그 스스로 현재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존재는 시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존재 속에 시간이 있고 그렇기에 존재에게 시간은 영원한 현재다.

이로써 새로운 운명이 가능하고 새로운 현재가 생성되는 것이다.

 

 

 


청소부<할머니>가 혼자서 졸고 있는 대학 복사실에<여자>가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온다. 여자는 아주 먼 곳, 지금으로부터 십 년은 훨씬 넘고 이십 년은 조금 안 되는 먼 곳으로 부터 돌아오는 길이다. 마흔이 다 되도록 아무 것도 이루지 못 하고 한심하게 살아온 여자는 스무 살 시절, 꿈을 실현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 여긴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다. 대학 복사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때, 자신을 깊이 사랑했던<남자>의 고백에 ‘네’라고 대답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여자는 이미 남자의 큰 성공을 보았으므로 남자의 애인이 되는 것은 곧 자신의 성공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예전의 그때처럼 진행되리라 기대했던 여자는 그러나 곧 절망하고 만다. 남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른 사람이란, 다름 아닌 과거의 자기 자신, 되돌아온 이 시간대의 진짜 주인인<소녀>이다. 여자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한껏 기대했으나 예상치 못한 소녀의 출현으로 인해 ‘과거’라는 낯선 시간에 불청객이 되어 떠돌게 된다.
소녀의 장래희망은 작가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정말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랑 따위엔 관심이 없다. 사실 소녀에게는 자신을 예전부터 짝사랑하던, 유능한 물리학자인<남자>가 있다. 그러나 남자가 얼마나 잘 났건 해놓은 일이 얼마나 대단하건 소녀에게는 별 것 아니다. 소녀에게는 자신의 꿈 말고는 대단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고백도 거절해 버린다. 그때, 여자를 만난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보았다. 여자는 분명히 미래의 자기 자신이다. 뭘 하다 왔는지, 왜 이 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성공한 작가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끔찍하다. 게다가 남자에게는 왜 그렇게 추근대는지... 뭔가가 있다. 설마 완전히 실패한 건가, 내 꿈도 완전히 실패하게 되는 건가, 불안하다.

 

 

 


여자는 새로운 시간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소녀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남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그러려고 온 것 아닌가. 물론 남자가 사랑하는 건 소녀지만, 그건 걱정 없다. 소녀는 끝끝내 남자를 거절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남자의 마음을 돌리는 일은 쉽지 않다. 예전엔 자신을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그리고 소녀를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실패하고 좌절할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저렇게나 열심히 살고 있다니... 게다가 저 오만함! 어렸을 때 내가 저랬었나? 도대체 뭘 믿고? 소녀를 보고 있으면 소녀의 자신감에 전염되는 것 같다.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소녀의 인생이 정말로 빛날 것만 같다. 여자는 그런 소녀를 보는 것이 미안하다.
소녀는 여자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였고 그걸 뒤집어보려고 과거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녀는 절망하고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 소녀는 여전히 작가를 꿈꾸고 여전히 습작을 지속하며 자기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여자는 그런 소녀의 어리석은 오만함에 기가 찰뿐이다. 그 즈음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에 큰 진전을 갖게 된다. 새로운 논문에 대한 반응 때문에 괴로워하던 남자는 여자에게 위로를 받고 여자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여자도 남자도 이런 것이 그들이 꿈꾸던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남자를 붙잡아야하기 때문에 여자는 이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지속하려 한다.
그때, 소녀의 공모 당선 소식이 전해온다. 소녀가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여자의 인생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서로가 자기 자신이라 믿었고, 실제로 한때 한 사람이었던 소녀와 여자는 이제 서로가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존재란 단 한 번뿐이기 때문이다.

 

극작가 이강백씨는 ‘그 연출 방법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한 후 “한국 연극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한 작품”이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작가 해윤
창작집단 ‘멀쩡한소풍’ 대표
각종대본주문제작소'스토리퍼즐'
작/ 「사육제」, 「도화골 음란소녀 청이」,「단 한 번과 두 번」, 댄스뮤지컬「오르페오」, 소리놀이극「으라차!방귀쟁이며느리」, 동화 발레「강아지똥」, 별별이야기2「샤방샤방샤랄라-결혼이주여성 편」
수상경력
제 1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 부문 당선 - 사육제
제 7회 신작희곡페스티발 당선 - 청이 이야기
제 7회 옥랑희곡상 당선 - 단 한 번과 두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