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성제 '숙희, 돌아오다'

clint 2023. 7. 9. 20:26

 

2003 2 어느 , 떠난 20여년 만에 21살된 정박아 딸과 6개월된 혼혈아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숙희는 알아낸 옛날 주소만을 의지한 ,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찾아 나선다. 한편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고 화장터에서 돌아오던 , 길에서 우연하게 숙희와 마주친 숙의의 계모 정순은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숙희의 모습을 보고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이 경멸하는 그녀, 숙희가 남편에게 버림받고 자식마저 잃게 자신을 동정할까 자신의 동생을 애타게 찾는 숙희에게 그의 죽음을 철저하게 숨긴다. 하지만 췌장암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숙희는 정상이지 못한 자신의 딸과 혼혈아로, 고아로 살아가야 아들을 위해 정순에게 생떼를 쓰며 정순의 아들이 숙희 자신을 모른 사람이 아니라 항변한다. 그러는 가운데, 암의 고통으로 순간순간 사경을 헤매며 숙희는 악몽 같던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을 고아원에 버린 엄마, 5.18민주화 운동 당시 길을 걷다 군인에게 맞아 뇌출혈로 쓰러진 애인과 애인의 병간호를 위해 기지촌 양공주로 생활했던 , 미군과의 결혼 폭력과 매춘으로 얼룩진 , 이후 아랍계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사고로 인해 죽음을 당한 자신의 과거를 곱씹으며, 원인은 자신을 보호하여 주지 못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붕괴된 탓이라 믿고 불행했던 과거가 자식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생명의 시간을 쪼개 아버지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70여생을 남자를 찾아 나서기 위해 대구, 중앙로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게 된다. 그때가 2003 2 18일이며 오전 9 53분이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글 김성제

수많은 역사가 새로 쓰이고, 그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며, 그 시대를 어떤 모습으로 미래에 반영시키게 될 것인가? 해마다 발생하는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커다란 사건들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지표를 새로 잡고, 나아갈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 삶의 주체 자라고 스스로에게 의식시키지만 내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고,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흐르는 시대의 조류는 그 어느 곳 1%에도 속하지는 못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끝없는 좌절과 한 자락의 희망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자신이 이 세상의 주축이요, 자신을 제외하고는 교집합을 이룰 수 없다는 강한 신뢰로 삶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불필요하고 전혀 의식하지도, 완전히 무가치한 어떤 한 것이 타인의 그 뭔가에 움직여 나만의 고유 영역이 파괴되고 잔재조차 남지 않게 되어버렸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으로 분노하는가? 하지만, 그에 대한 영향력이 본인에게 전혀 그 기세를 떨치지 못할 때, 마치 태풍의 영역 을 벗어나 따스한 햇볕 속에 한 여름을 편안하게 보낸 이들처럼, 우리는 그 시대를 얼마나 찬미하고 풍족함을 자랑했었는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날의 커다란 사건은 더 많은 역사를 가로 새기기 위해 교정되어지고 확대 또는 축소시켜 지지만 그 사건 밖에 있었던, 그렇지만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찢어지고 끊어진 한 개인 의 소중한 삶은 영향권 밖의 그 누구, 그 무엇도 관심을 가져지지도, 치유하려 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어느 날 예기치 않는 돌풍에 휩쓸려, 부러진 나무 가지에 자신의 심장을 찔리기 전 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섬뜩한 사실을 함께 공감하며, 그 얻을 수 없는 해답을 갈구하고자 한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사람들에게, 혹은 한 개인에게 삶이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인간의 가치관에 의해 다양한 색깔과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때로는 오색 창연한 빛으로, 때로는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인간의 삶에 색칠을 할 것이다. 삶은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면성을 보란 듯이 양 손에 들고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 중 행복을 받아 든 인간은 그의 일생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것 이며, 그렇지 않은 이는 불행이라는 그림자에 쌓여 일생을 어둠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양손에 들려있는 행복과 불행의 선택은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삶이 스스로가 행복과 불행의 주인공을 선택해 그것의 주인됨을 명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삶에 대해 너무나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인간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라면 불행을 선택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혹 있다면 우리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 불행이라는 것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할 권리가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있다. 모든 인간들은 그 행복이라는 아름다운 물감에 의해서 자신들의 삶을 채색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여기 상처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주 작은 행복인데 그녀의 일생은 불행의 연속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행복이 없었기에, 그녀가 지켜내고 유지해야할 행복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남들에게 다 있고 누구나 누리고 있는 행복을 조금 원했었고, 계속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언제나 잘못되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희망이 없어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오직 불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이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다. 그 녀는 옳은 것을 선택해야 했고, 늘 자신이 옳고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바랬다. 과일 하나를 고를 때 조차 늘 달콤한 것을 선택 했지만 그녀가 고른 과일은 모두 썩어 있었고, 그녀가 만진 과일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 지독한 악취만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역사가 새로 쓰이고, 그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임이 분명한데 새로이 써진 역사는 인간의 삶을 여지없이 변화시키고 만다. 그 때마다 우리들은 그 새로운 역사에 조금이라도 적응하지 못하거나 흐름에 역행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이 끝없는 좌절과 절망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하려고 이제까지의 삶의 지표를 수정하고 방향을 정정하여야 한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선택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여기 상처받은 또 한 여자가 있다. 상처받기 전까지는 남의 상처에 대해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얘기치 않은 상처의 아픔에 당황한다. 불행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불행이란 인생에서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실수이며 단지 운이 없는 자가 겪는 사고라고 믿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난다. 불행만을 선택한 여자. 그 여자의 등장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망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에 여자는 자신 앞에 나타난 그 여자의 존재를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경악한다.

 



시대의 변화는 개인의 삶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 삶을 과거보다 더욱 윤택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인생 자체의 존재 마저 풍비박산으로 만들 수 도 있다. 소용돌이 치는 역사속에서 살아나온 자들은 그 지옥같은 어둠속에서 빠져 나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 여전히 그 어둠에서 헤매며 아파하는 자들의 절규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역사속의 커다란 사건은 더 많은 역사를 가로 새기기 위해 교정 되고 확대, 또는 축소되어 버린다.
그 가운데 역사의 중심에 서있지 않은 소수들의 삶과 생명은 존중되어지지 않고 그들이 가진 의미조차 사라져 버리게 된다. 거기서 생겨나는 상처와 아픔, 고통과 절망 따윈 역사의 주인공과 그 시대에서 승리한 자들에게는 관심의 꺼리가 될 수 없다. 다만, 방치했던 소수들의 상처와 아픔이 곪아 터져 버리게 되는 어느날, 그들의 상처가 전체 공기를 오염시켜 자신들을 질식시키려 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의 아픔을 안다. 그래서 상처받은 자는 또 다른 상처 받은 자의 위안이 될 수 있다. 여기 두 여자는 상처받았고 상처 받은 자이다. 한 여자는 또 한 여자의 슬픔을 몰랐지만 이제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해 그 여자의 쓰라린 상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 여자의 손에는 불행의 씨앗이 들려있다. 한 여자는 행복을 얻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고 한 여자와 마주친 또 한 여자는 행복의 끝에서 이제 막 떨어져 나가려는 자신의 행복이라는 파편의 조각을 한 개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상처가 주는 고통은 상처 받은 자만이 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내 몸의 또 다른 상처가 고통의 기억을 상기 시키려고 하고 있다. 우리는 고통의 기억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니면 상기시키는 그 것을 다시 한 번 외면해야 하는 가?

우리들이 원하는 행복은 방어벽이 약한 컴퓨터와 같다. 그것은 수 많은 바이러스에 노출된 네트워크상의 컴퓨터처럼 언제든지 예기치 않은 치명적 위험에 의해 깨어질 위태로움을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들의 행복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원하기 보다는 그 행복이 금이가거나 깨어지지 않기를 더 바란다. 따라서 남의 불행의 그림자가 자신들에게 드리워 지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며 행여 불행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경계망을 친 채 불행한 이들을 외면하고 무엇으로도 불행한 것과 자신과의 연결을 부정한다.
불행한 자들과 불행한 요인과의 관계 공유는 자신들의 행복의 근본을 뒤 흔들고 기반을 약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들이 왜 불행한지, 어떻게 불행해졌는지, 무엇이 불행하게 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설사 나와 끊을 수 없는 관계의 누군가 일지라도 말이다. 부정할지는 모르지만, 불행의 파편이 자신에게 튀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안도의 한숨만 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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