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찬규 '창신동'

clint 2023. 5. 13. 14:52

 

연주는 친한 언니의 자살로 홀로 남겨진 갓난 아기를 돌보고 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아기의 친척들이 집으로 모이지만, 각자의 가정 형편을 이유로 아무도 선뜻 그 아이를 돌보려고 하지 않고 연주는 자신이 키우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연주를 못마땅해 하는 배다른 남매인 오빠 현수는 동생 이상의 감정으로 연주에게 집착과 폭력을 휘두른다. 결국, 현수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연주가 동네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연주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 과정에서 연주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되고 홧김에 현수를 살인하게 된다. 유일하게 연주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건 아기의 할아버지 동식일 뿐이다. 동식은 연주에게 아기를 부탁하며 자신이 그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연주는 모든 비밀을 감춘 채, 아이와 함께 창신동에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창신동>은 아직도 골목 골목마다 영세한 봉제가게가 빼곡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마저 드는 창신동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부모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 갓난 아이와 그 아이의 양육을 피하려는 친척들, 가족과 다름없는 언니의 아이라는 이유로 남겨진 아이를 책임지려는 여인(연주)를 둘러싼 이 작품은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창신동이라는 좁은 동네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을 겪는 사람들의 삶은 좀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은 대물림 되고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70년대성장과 개발이라는 국가가 앞세운 명분 앞에 노동을 착취당하고희생을 강요당한 시기를 보낸 사람들, 그들은 이미희생이 익숙해졌고 가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서로를 홀대하며 서로 간의 존중과 계급이 거세된 그 곳에서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인(연주)와 그럼에도 창신동을 떠나지 않는, 변하는 것조차 이제는 버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둡고 비극적이기만 한다. <창신동>은 이런 어두운 현실에서도 아이를 안고 창신동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연주)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바라는 현실적인희망은 과연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풍경, 지워지는 시간들 속에서 오래된 동네들은 잃어버린 시간의 저장소 같다. 그런데 풍경으로 서 있는 낡은 담벼락 안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그곳엔 되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도 동화 같은 판타지도 없다. 왜냐하면 담벼락 안에는 시간이 멈추어 있는 추억이 아니라 지금 내 삶에 흐르는 시간과 똑같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창신동>은 그 담벼락 안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곳에 흐르는 시간은 사뭇 지독하다. 대문이자 현관문인 문 하나만 열면 골목과 곧바로 이어지는 작은 집. 무대 안쪽 깊숙이 놓여 있는 두 짝 싱크대가 부엌이 되고 한쪽엔 높이가 다른 방들이 있고 맞은편 구석에는 화장실이 있고 그 가운데 비어있는 공간이 거실이다. 무대의 불안한 기운은 때 묻고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위협하는 결핍을 지우려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는 이집 사람들의 불안한 삶 때문이다.

첫 장면, 이제 겨우 소녀를 벗은 젊은 여자가 우는 아이를 어르고 있다. 현관문이 열리고 하나 둘 이 집 식구들과 이웃들이 들고나는 동안 젊은 여자는 사람들을 맞고, 그들을 위해 상을 차리고 사람들의 고단함을 염려한다. 그런데 앳된 이 젊은 여자는 이 집의 안주인도 아닐 뿐더러 식구도 아니다. 이 집을 들고 나는 언니, 오빠, 할아버지, 아저씨는 여자의 보살핌을 만류하고 미안해 하지만, 그들 또한 여자의 보살 핌 없이는 삶을 지탱하는 것이 어렵다. 오늘은 그녀가 어르고 있는 아기 엄마 장례식날, 아기 엄마는 미싱일을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라나 노동자인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남편은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세상 속에서 목숨을 끊었고 그녀 역시 남편을 따라 어린 생명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이의 혈육이라곤 이모와 할아버지뿐, 아이의 이모는 안간힘을 쓰며 이 집을 탈출했다. 지금 자신의 삶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집과 식구들의 굴레를 끊어내야 한다. 아이의 할아버지이자 이집의 주인인 동식. 그는 창신동에서 평생 미싱사로 일했다. 이 집은 그가 자신의 손으로 바람 막을 벽을 세우고 비 가리는 지붕을 얹고 방을 들여 마련했다. 그는 이 집에서 손가락 마디마디가 불거져 나오도록 미싱을 돌리며 일했다. 한때 이 불안한 삶의 탈출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 적도 있지만, 결국 덧대고 이어 붙인 이 집에 남았고 어린 자식을 두고 목숨을 끊은 딸의 장례를 치루고 있다. 동식도 자신의 몸 안에서 자라나는 암으로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모른다. 저 혼자서 살아낼 수 없는 것은 이들을 돌보고 있는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복오빠라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이 동네에 흘러와 살게 되었다. 그때 어린 그들을 동식의 식구들은 가족처럼 거두었다. 지붕이 잇닿아 있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삶이 그렇다. 온전하 지 않은 삶, 부서진 삶을 그때그때 덧대며 살아온 것이다그러나 <창신동>은 상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는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연극은 시종 성폭행과 살인 등 충격적인 사건, 원수의 손에 자라난 아이라는 끔찍한 비밀 등의 극단적 상황을 향해 치달아간다. 그런데 가혹함은 그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삶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가혹함은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사건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관계들이 결국 이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 부서져 가는 삶을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는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제 집에 불을 지르고 제 가족을 죽도록 폭행한 이의 손에 구출되어 그의 이복 여동생이 되어 삶을 이어온 그녀나 결국은 세상의 벼랑 끝에서 그녀 말고는 부여집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의 이복 오빠나 그녀에게 푼돈을 쥐어 주며 그녀의 몸을 더듬는 동네 아저씨들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녀가 잡은 길이 그녀와 이복 오빠와의 굴레를 끊지만, 그녀의 손에 든 칼을 제 손으로 옮겨 집은 동식은 그녀에게 혼자 남은 손녀를 맡길 수밖에 없다. 혼자 남은 그녀에게는 등에 업힌 아이가 유일한 삶의 버팀목이 된다. 연민도 없고 위로도 없다. 연극의 한 장면. 그녀의 이복 오빠와 동식의 친구인 재광이 주인 없는 이집의 거실에 앉아 취해가는 장면, 재광은 한때 번성하던 창신동과 문래동을 회상한다. 재광의 미싱은 바쁘게 돌아가고 악착같이 일해서 번 돈으로 공장에서 만든 부품들이 쭉쭉 뻗어 올라가는 아파트에 쫙 깔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그녀의 이복오빠는 낡은 집들에 불을 지르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죽도록 패고 있었을 것이다. 이마도 그때 누군가는 그 땅과 그 위에 지어진 아파트를 사고 팔면서 성장의 과실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연극 <창신동>의 가혹함은 그 폭력 속에서 지탱하고 있는 삶이 그때그때 이어 붙이고 덧대어 지어진 무대 위의 낡은 집 거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불안한 삶들은 예 외적인 어떤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국근대화, 산업화의 역군들의 놀라운 역사에 얽혀 있는 우리의 욕망과 폭력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둔감함이, 그리고 여전히 폭력으로 지탱되는 우리의 삶이 이 가혹한 이야기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연극인 리뷰- 김소연 평론가]

 

 

작가의 글 박찬규

정확히 1년 전에 이 작품을 우리 연극 만들기' 20주년 공연으로 올렸었다. 당시 나는 작가의 글에 2012년 대선 때 89%를 기록한 50대 투표율에 대한 물음이 이 작품의 시작점이라고 했었다. 분명, 저 숫자 안에는 여러 입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국민'으로 복무하던 시절 학습된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은퇴세대를 비롯한 노년층의 과거를 생각해 보았다. 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GDP 30배 뻥튀기 되는 국가의 성장을 자신들의 눈으로 지켜본 그들.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국가에, 분명 고마웠을 것이다. 내가 그 시절을 살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에도 나는 늘 혼란스러웠다. 그들의 현재가 너무도 비참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회적 지표들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할머니부터 아버지까지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은 그랬다. 그리고 그 비참한 현실은 자신들의 자식 세대에게 대물림 된다. (나는 이 말이 어떤 특정 계급에 국한된 말로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어딘가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따위는 자연스럽게 기세 된다. 나는 이 체념의 과정 뒤에 남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엇으로 그들이 버텨 나갈지, 이번에 수정하면서 그 고민들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박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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