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20세기 최고의 여성작가 사라케인의 “페드라의 사랑”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사회의 부조리를 특유의 세밀하고 정교한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탁월하게 표현해 낸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사라케인은 독일의 천재적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리투아니아의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 등 젊은 연출가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최근에도 전 세계에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히폴리투스. 그는 방에 틀어박힌 채 집히는 대로 먹고, 자위하고, 아무하고나 관계를 갖는다. 그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는 계모 페드라는 그를 위해 의사를 부르지만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한다. 히폴리투스에 대한 사랑을 참을 수 없는 페드라는 그의 생일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의 고백은 상처가 되어 돌아오고, 페드라의 친딸인 스트로프 역시 페드라의 무리한 사랑을 막아보려 하는데… 그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대가들이 무섭게 다가오는데…

그리스 신화 중 페드라만큼 후대 예술가들의 창작의 재료가 된 인물도 드물 것이다.
희랍비극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투스'를 필두로, 세네카의 '페드라' 그리고 라신느의 '페드라'까지 '페드라 신화'는 '히폴리투스'의 입장에서 혹은 '페드라'의 입장에서 정념과 광기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왔다.
후대에 이르러서도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 서부 농장시대의 모성애와 결합한 욕정에 관한 탐욕으로 변형되었고, 그리스 감독 쥴스닷신에 의해서 '죽어도 좋아'라는 작품으로 엔딩의 격렬한 바흐의 선율에 맞춰 '페드라!'라고 외치며 파멸하는 장면으로 고대의 이 신화를 대중적인 비극적인 멜로드라마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진 계모라는 금단의 사랑은 희랍시대부터 현시대까지 절대 가질 수 없는, 아니 가져서는 안 되는 사회적인 '금기'의 결정체이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리는 멜로드라마의 소재로선 보편적인 공감대를 주고 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약간 변형된 페드라 스토리인 '오이디푸스 신화'는 '햄릿'을 비롯하여 '프로이드, 융, 라깡' 등 심리학의 핵심용어가 될 정도로 인류문화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자, 그럼 1996년 사라케인이라는 천재작가가 썼다는 이 '페드라의 사랑'은 과연 이 21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동시대에 '아테네의 왕자' 히폴리투스와 '미노스의 공주이자 아테네의 며느리' 페드라, 그리고 희대의 영웅 테세우스는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
유진오닐은 서부개척시대 대농장장으로, 줄스닷신은 대 선박 왕으로 과히 신화의 세계에서 왕족이라는 모티프를 적절하게 현대화 시켰다면, 사라케인의 왕족은 누구일까? 영국작가임을 고려하면 여전히 왕족이 남아있는 영국의 현실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면, 희랍비극의 코러스 같은 존재인 막 뒤의 인물들, 즉 민중들이 후반부에 등장하여 파륜을 저지른 왕족을 처단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은둔 형 외톨이 같이 방에 쳐 박혀 헐리웃 영화와 과자에 파묻혀 자위나 하고 모빌 카나 가지고 노는 히폴리투스는 과연 왜 그럴까? 니체주의자같이 신을 부정하고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반항아인 그는 과연 누구일까? 흡사 아버지에 의해 살해되고, 민중들에 의해 넥타이로 매달려 죽고 억울한 누명도 변명하지 않고 스스로 희생되는 그는 현대판 지저스의 명백한 상징으로 보이는데, 그럼 페드라와 스트로프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란 말인가? 그럼 과연 '테세우스'와 정략결혼을 하고 그의 아들인 '히폴리투스'에게 정념과 광기로 다가가는 '페드라'는 누구인가? 영국 왕실의 며느리이자 자유로운 연애로 물의를 일으키고 희생당한 '다이아나비'일까? 아니면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일까? 아니면 예수를 배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만든 '가롯 유다'인가? '스트로프'는 사랑하는 연인을 의붓 남매로 들이게 된 비운의 여인인가? 아니면 아버지 테세우스와 오빠 히폴리투스를 유혹한 창녀 막달라 마리아인가? 히폴리투스의 처형장에 등장해서 그를 살리려다 희생당하는 그는 성녀 마리아로 삶을 마감한 듯 보인다. '테세우스'는 희랍비극의 페르세포네를 구하러 하데스에게 간 아테네의 제왕적 군주인데, 그럼 영국의 왕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예수의 사형을 집행한 빌라도를 말하는 거 일까? 아니면 예수의 아버지 즉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는 것일까? 그럼 이 비극적인 가족사를 뒤에서 지켜보며 직접 사형을 집행한 코러스들은 황실의 불륜을 처단하는 영국 민중들인가? 아니면 예수를 처형하는 화가 난 바리새인들인가? 그저 바람기 많고 불순하고 나쁜 남자이지만, 한편으론 왕자라는 지위와 세상에 쓸려가기엔 너무나 섬세하고 외롭고 순수해서 진정한 사랑이 그리워 칭얼대는 소년인 히폴리투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죽음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결국 그를 위해 희생당함으로써 히폴리투스가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는)을 전해주는 성녀이자 창녀인 즉 마리아 이자 막달라 마리아인 곧, '페드라'와 '스트로프'가 절대 순수, 절대 사랑인 '에로티시즘과 모성애 그리고 희생과 죽음'을 통해 던지는 하나의 사랑담으로 볼 순 없을까?
그 '금기를 위반하는' 순수한 사랑을 불륜과 패륜, 강간과 치정 그리고 처형과 처단으로 몰아세우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의 충고로 볼 순 없을까? 솔직한 세속주의자인 '히폴리투스'가 될 것인가? 죄를 저지르고도 아들을 제물로 바쳐 회개하며 살아가는 '테세우스'가 될 것인가?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던지는 정념의 여신 '페드라'가 될 것인가? 가족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열정을 뭍고 사는 '스트로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불륜으로 처단해 버리며 자신의 희생과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바리새인들'이 될 것인가? 아르테미스에 의해 수습되어 어딘가에 살고 있을 '히폴리투스' 그리고 부활해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을 '예수' 또 어딘가 정념을 불태울 '페드라'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막달라 마리아'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순간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저들에게 돌을 던지시진 않으신가요?

사라 케인(Sarah Kane, 1971 - 1999)
1971년 2월, 저널리스트인 양친으로부터 태어남.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 연극과 수석 졸업. 단 6개 작품으로 20세기 마지막 천재라 불림.
<폭파 1995>이후 4편의 작품<페드라의 사랑 1996><정화된 자들 1998><갈망 1998><4.48 사이코시스 1999>와 10분짜리 TV 드라마<스킨 1997>을 남기고 1999년 2월 병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함
케인에 대한 연극사적 평가는 가정 내 문제나 개인일상사가 무대의 이야기 거리였던 당시 영국 연극계에 불을 지피며 새로운 극작가의 시대인 90년대를 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환멸과 모순에 가득 찬 삶의 현실을 더 이상 리얼리즘이 담아낼 수 없을 때 그녀는 폭력과 전율의 ‘뉴 브루탈리즘’으로 동면 상태의 극장을 깨웠다. 연극은 축구만큼이나 객석을 달구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연극은 폭력을 무대에서 난사하나 그 함축적인 이면에는 따스한 인간의 구원을 인도한다
관객의 눈 앞에서 내던져지는 잔인한 폭력, 사지의 절단, 숨김없이 행해지는 자위행위, 강간들과 더불어 서정적인 시적 이미져리가 관객의 정서에 스며드는 추함과 아름다움의 혼미한 미학. 스러져 가는 무의식을 설명이나 해석없이 그대로 무대에 담아내는 것. 상상을 초월한 젠더의 유희. – 케인의 연극은 혼돈에 가득 찬 삶의 조건과, 사회와 인간에 붙어 있는 위선의 껍질을 도려내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무대 위에서 치뤄지는 하나의 제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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