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사라 케인 '크레이브'

clint 2015. 11. 9. 18:30

 

 

 

 

 

 

Crave는 1998년 8월 13일 에딘버러 트라버스 극장에서 패인 플라우가 첫 공연을 올렸다. 배우는 다음과 같다.
C : 샤론 딘칸-브르스터(Sharon Dincan-Brewster)
M : 잉그리드 크리이지(Ingrid Craigie)
B : 폴 토마스 히키(Paul Thomas Hickey)
A : 알란 윌리암tm(Alan Wiliams)
연출 : 비키 페더스톤(Vickey Featherstone)


크레이브는 사라케인이 사회적 폭력과 젠더의 주제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천착해 들어가며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은 A, B, M, C라는 4명의 인물이 나오지만, 내가 느낀 작품은 실제로는 한 사람의 독백과 같다는 느낌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인격 같은 것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고백을 한다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자기 고백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인간이 드러내놓고 밝히기 어려운 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나타낸 것 같다. 강간이라든지, 경험, 유혹 등 많은 것이 그러했다.

 

 

 

양정웅 연출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무대화한 이 작품은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 이 작품에서는 영상 이미지가 거의 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상 비중이 크다. 전통적인 개념의 몸 연기는 없다. 영상으로 투사된 얼굴이 드러내는 표정연기만 있을 뿐이다. 희곡낭독 회를 영상장비의 도움을 받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의 특이한 형식이다. 네 명의 배우는 무대 중앙에 각자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각 배우 앞에는 영상카메라가 얼굴 높이로 서 있다. 카메라가 잡은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 영상은 무대 뒷면에 2X2의 큰 사각액자틀 형태로 투사된다. 배우들은 컴퓨터 화면의 대본을 보면서 극적인 대사치기와 표정연기를 한다.
영상에 나타난 표정이 핵심 이미지인 이 연극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로 그득하다. 각각 두 명의 남자배우와 여자배우가 등장하지만 대본상의 인물은 A,B,M,C라고만 설정되어 있고 성별 구별 또는 나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더구나 관객은 등장인물이 A,B,M,C인 것조차 모른다. 이들이 토해내는 말들은 서로 의식하며 하는 대화가 아니다. 흡사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 순간순간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말로 풀어낸 것 같다. 그 기억들이란 강간, 간음, 소아성애, 마약, 정신장애, 살인, 자살. 이런 것들이다. 가끔 이들 A,B,M,C 사이에 한 사람이 얘기한 데 대한 응답 느낌의 대사가 오가기는 하나 얼마 안 있어 연결고리는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등장인물은 넷이나 이들이 각자 하는 말들은 여럿이 아닌 한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다. 독백 같은 말이기 때문에 네 명이 서로 보는 일은 없다. 모두 거의 정면을 응시한 채,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미친 듯 웃기도 한다. 영상 속의 등장인물 표정과 대사를 통해 그의 아픔을 읽어내고 고통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된 작품이다. 대사는 난해하지만 영상과 하나하나의 언어가 주는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고 시적이어서 아픔의 전이를 가속화시킨다.
배우들은 얼굴이 아주 깊게 클로즈업되어 공연시간 한 시간 내내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다.

 

 

 

C : 내 마음은 텅 비었어
M : 왜 웃고 있어요?
C : 누군가 죽었어.
B : 내가 웃고 있다고 생각해?
M : 왜 엉엉 울지요?
C : 당신은 내게 죽은 사람이야.
영국 극작가 사라 케인(1971-1999)의 희곡 '크레이브(Crave)'의 일부다.
A, B, C, M이라 불리는 4명의 화자는 저마다 말을 풀어놓지만 행간에서 논리적인 흐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언어는 일정한 의미나 메시지는 관객에게 친절하게 배달되지 않고, 발화(發話)되는 순간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크레이브는 갈망한다는 뜻이다. 단지 '원한다(want)'의 차원을 넘어 강렬한 갈증을 내포한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케인은 이 작품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절망을 이기려 했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요.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갈망과 열정을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극 중 '자유낙하'를 통한 자유를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20세기 마지막 천재 작가라고 불리는 케인에게서 1930년대의 요절한 작가인 이상의 '날개'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죠."
그는 이 난해한 실험극에서 '힐링'이라는 말을 찾았다.

 

 

 

겉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지만 내면은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 이번 연극의 몫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힐링'은 편안함, 고요함, 평화로움과 같은 정서를 일으키는 말인데 일정한 서사도 없이 거친 말들을 툭툭 내뱉는 이 실험극에서 관객은 어떤 방식으로 치유된다는 것인가.
"인정하든 부정하든 세상엔 왜곡된 사랑, 절름발이 사랑은 존재합니다. 사람 내면엔 외로움과 상처, 어두운 본성도 있습니다. 부정하고 있던 이러한 내면의 모순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자기 인식의 순간은 상당히 처절하죠. 관객이 감추고픈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도록 하는 것이 이 연극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편한' 치유 방식을 택했을까.
"내면의 아픔을 끄집어내 이를 언어화할 때 그 자체로 치유일 수 있습니다. 파편적인 인물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일그러짐을 직시하고 현재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거죠."
실제 등장인물이 토로하는 말은 일그러진 기억과 상처에 관한 것이다.
"그래 난 떨고 있어요. 그 여자에 대한 기억에 흐느끼면서, 그 여자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내가 그 여자를 고문하는 사람이 되기 전, 그 여자가 내게 끼어들기 전, 우리가 오해하기 전, 말 그대로 내가 그 여자를 본 바로 그 첫 순간, 미소를 짓고 햇빛 가득 담은 그 여자의 눈, 그때 이후 내내 맹렬히 벗어나는 그 순간에 대한 슬픔으로 몸서리쳤지." (크레이브, A의 말 중)
"그러나 아버지는 그랬지. 열여덟 살에 자동차 사고로 코가 부서졌어. 난 이걸 얻었지. 유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걸 얻었어요." (크레이브, B의 말 중)
관객 각자에게 이미지로 파고드는 말이 극 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라주처럼 흩어진 독백입니다. 등장인물 사이에도 정해진 인터렉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 위 배우의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미지를 인식하고 그대로 느끼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