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애란 '플라이 데이터 리코더'

clint 2015. 11. 9. 16:17

 

 

 

 

 

줄거리
일곱 살 지용이는 육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에 할아버지,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엄한 할아버지는 지용이에게 ‘엄마’를 알려주지 않으려고만 한다. 그러다 이 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경비행기가 추락하고 블랙박스를 지용이가 발견하게 된다. 삼촌은 이 블랙박스가 지용이의 엄마라고 한다. 그리하여 지용이는 ‘블랙박스 엄마’를 갖게 되는데…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오래 전 조상들이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그들이 지나온 구덩이와 협곡, 들판 모두가 선을 이루어 만들어 낸 하나의 고대 상형 문자가 섬의 이름을 가르쳐주었고, 그래서 이 섬은 플라이데이터리코더가 되었다. 섬 안에는 한땐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가 있었고, 지금은 적잖은 사람들과 학교, 텔레비전, 다방이 있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37번지, 파란색 슬라이트 지붕 아래엔 섬 밖으로 나가보지 않은 일곱 살 난 아이와 그의 무서운 할아버지, 책을 많이 읽어 모르는 게 없는 삼촌이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자주 화를 냈고, 아이는 똥오줌을 가린 지가 오래인데도 목청 좋은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찔끔찔끔 오줌을 지렸다.
관광지도 아닐뿐더러 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 중의 하나인 플라이데이터리코더엔 육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어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날의 오후는 특별했다. 마루에 누워 굴회를 먹고 있던 아이의 시선이 하늘 어디 한 점에 찍혀 멈추었다가 점점 이동했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고기 배를 따고 있던 할아버지는 아이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추락하는 노란 비행기를 보았다. 꼬리에 긴 연기를 달고,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무뚝뚝한 평화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안겨드는 비행기의 모습은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잠시 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추락했다. “할아버지. 저게 뭐예요?” “아마 비행기 같다만, 그런데 저건 마치… 마치 수리부엉이 같구나.”
비행기의 몸체는 등대 위에 꽂혔다. 꼬리는 불길에 둘러 싸여 야생 대마 밭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수천 평에 달하는 대마 밭이 활활 타들어갔다. 이틀 뒤 큰 비가 내려 불이 꺼질 때까지 대마 연기에 취한 섬사람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노인은 아이 앞에서 춤을 추고, 재주를 넘었다. 신이 난 노인은 마루에 누워 두 발에 아이를 올려놓은 뒤, 번쩍번쩍 ‘비행기’도 태워주었다. 아이도 손뼉을 치고 웃으며 좋아했지만 다음 날 제정신이 들었을 때, 아이와 노인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색해했다.
“아버지, 진지 드시죠.” 큰비 때문에 뱃길이 막혀 섬에 들어올 수 없었던 아이의 삼촌은 비가 그친 뒤 집에 들어왔다. 가족이 모여 저녁상 앞에 앉았을 때 텔레비전에서 마침 사고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방송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부는 이것이 단속을 피해 총기나 마약 밀수를 하는 국제 마피아 집단의 비행기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블랙박스의 발견이 시급한 때입니다.”
아이의 우상이었던 사내는 저녁을 먹은 뒤 진지한 표정으로 시사주간지를 읽고 있었다. 부록으로 주는 성인용 ‘부부백과’를 위해 노인이 산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자란 사내는 한때 플라이데이터리코더에서 제일 잘나가는 초등학생이었다. 물론 전교생이 열두 명밖에 안 되는 분교 안에서였지만. 그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우주인 선발 대회에서 2만 명이 넘는 지원자 중 최종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섬사람들은 모두 사내를 응원했지만 사내는 우주인 선발 최종심에서 2등으로 떨어졌고, 살면서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그때 내가 공모에서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라고 한탄했다.
“삼촌, 이거 정말 다 읽었어?” 아이가 백과사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내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 그리고 제발 누군가 그것을 영원히 물어봐줬으면 좋겠다는 듯 활짝 웃으며 “그럼” 하고 대답했다. “삼촌은 정말 모르는 게 없겠다. 그럼, 내가 뭣 좀 보여줄게, 뭔지 얘기해줄래?” 사내는 다시 잘난 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에 기뻐하며 그러겠노라 다정하게 대답했다. 아이가 삼촌에게 비밀이라는 약속을 다짐받고서야 가지고 온 것은 주황색 상자였다. 사내는 자신도 처음 보는 물건에 당황했다. 사내는 지금까지 아이에게 ‘모른다.’는 대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내는 아이의 눈치를 보며 상자 주위를 맴돌았다. 매끈한 금속성 물질로 이루어진 상자는 그을음이 묻어있었다. 사내는 상자의 냄새를 맡아보고, 흔들어 본 뒤에야 그것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블랙박스였다. 아이는 잠시 블랙박스가 왜 주황색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을 더욱 궁금해 했다. “그래서 이게 뭔데?” 아이가 물었다.
“이건, 네 엄마야.”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삼촌이 하는 말은 모두 믿었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엄마’는 드네프르콤비나트나 나트륨아미드, 셀룰로이드라는 말만큼 낯설고 어려운 말이었다. 음식을 잘하고, 헌신적으로 시아버지를 모셨던 아이의 엄마는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친정에 다녀온다 말하고 집을 나섰다가 타지에서 죽었다. 화재가 난 여관방에서 벌거벗은 사내와 함께였다. 때문에 노인은 아이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오면 옆집 기와가 들썩거릴 정도로 야단을 쳤다. ‘너희 엄마는 사람도 아니었다.’ 라고.
사내는 백과사전에서 본 어려운 말들로 블랙박스가 엄마라는 것을 아이에게 납득시키려했다. 아이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할아버지가 늘 말하던 ‘너희 엄마는 사람도 아니었다.’를 상기시켜주자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이해하는 체했다. 블랙박스 따위가 엄마라니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쯤 삼촌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마음에서였다. “엄마.” 아이가 블랙박스를 불렀다. 블랙박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준 엄마가 고마워서 그리고 삼촌의 말이 미더워서, 아이는 조금 가슴이 아팠다. 아이는 알을 품듯 가만히 블랙박스를 감싸 안고 체온을 나눴다.

 

 

 

찾기 위해 푸른 제복을 입은 정보원들과 연구원, 방송기자들이 헬기를 타고 섬에 도착했다. 뭍사람들은 이 정체모를 비행기의 추락에 대해 무척 불안해하며 블랙박스를 찾아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사고 현장을 조사하고,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수집하고 인가를 방문했다. 하지만 블랙박스는 쉬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고, 정보원들은 이렇게 작은 섬에서 블랙박스가 사라졌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종래엔 마을 사람들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럼에도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정부에서는 블랙박스의 구성 원료인 특수 합금을 추적하기 위해 플레이데이터리코더에 고성능 탐지기를 보내기로 했다. 물론 아이의 엄마가 된 블랙박스는 아이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37번지의 뒤뜰에 있었다.
탐지기가 섬에 온다는 뉴스가 전해진 저녁. 삼촌은 아이와 뒤뜰에 나가 ‘엄마’를 보내드리자고 했다. 아이는 거부했지만, 뭍에서 온 사람들이 엄마를 데려가는 것보다는 사내가 가리키는 하늘로 엄마를 보내드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해 그러기로 했다. 사내는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입을 맞추고 인사를 하게끔 시켰다. 아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엄마는 나랑 같이 자지도 않을 테고, 내가 상을 타도 머리를 만져주지 않을 테고, 언제고 내가 부를 때마다 대답하지 않을 테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뒤뜰로 바람이 불었고, 어둠 속, 블랙박스 위로 댓잎 하나가 팔랑 하고 떨어졌다. 삼촌은 그것이 엄마의 잘 있으라는 인사라고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아이가 다시 ‘으앙’ 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사내는 아이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도록 말없이 곁에 서 있었다. 한참 후 진정이 된 아이에게 사내가 인사를 하라고 속삭였다. “잘가요, 엄마. 어디서든 잘 있어 주세요. 그러면… 나도 무척 기쁠 거예요.” 아이는 천천히 블랙박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블랙박스의 차가운 볼을 만졌다. 아이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블랙박스에게 입 맞췄다. 삼촌은 다음 날 등대 아래에 블랙박스를 갖다 놓았다.
뭍사람들은 블랙박스를 들고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30분간의 녹음 내용은 블랙박스 부품의 손상과 잡음 때문에 대부분 해독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블랙박스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녹음된 조종자의 마지막 메시지 하나를 간신히 건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 한마디, ‘안녕’이었다고 한다.

 

 

 

김애란
작가 , 소설가
출생 1980년 (인천광역시)
등단 2002년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
학력정보
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수상정보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2013년 제18회 한무숙문학상
2011년 제2회 젊은작가상
2010년 제4회 김유정 문학상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작
2009년 제27회 신동엽창작상
2008년 여성신문 선정 2030 여성 희망리더 20인
2008년 문화의 날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2005년 제38회 한국일보 문학상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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