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남자의 바람, 자궁경부암 등 여자만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많은 일들. 여자라면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여자로서 억울한 일들을 당하며 살아온 여자들이 때로 다른 여자를 억울하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담당한다. 물론 남자도 남자라서 억울한 일이 없겠냐만 아직도 많은 부분 사라지지 않은 유교적 관습과 사회 풍토가 여자들 억울함의 비중을 높인다. 그러나 이미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부르짖은 바 있어 세상은 이러한 억울함의 토로조차 식상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자의 억울함을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이해야말로(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서는 우선 차치하고서라도) 남녀 구분 없이 개개인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여기, 통속적인 듯하면서 여전히 현실적인 소재를 다룬 연극이 있다. 여성으로서 살아온 한 인간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여성문제를 토로하는 연극[앨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이다. 젊은 시절, 바람기가 다분한 남자 이진수를 사랑해서 임신이라는 명목으로 결혼했으나 현재는 이혼한 여자 윤세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데 날벼락 같은 자궁경부암 선고가 떨어진다. 회사도 그만둔 채 혼자 빈 방에 틀어박혀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세라.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철없이 발랄한 부하직원 김민석이 찾아와 그녀를 자극하지만 귀찮을 뿐이다. 세라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남자 진수는 오랜만에 언경이를 만난다. 세라의 친구이기도 했던 언경은 젊은 시절 진수가 바람을 폈던 장본인이다. 세라의 소식을 듣고 착잡해진 그들은 다연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같은 시기 세라은 신경이 곤두서있다. 옆집인지 윗집인지 모를 공간에서 젊은 남녀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심각하게 싸우는가 하면 금세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비명 소리는 전구마저 다 닳아 어두운 세라의 집을 더욱 우울하고 음침하게 만든다. 세라을 찾아와 위로와 화해의 악수를 건네는 언경. 스스로를 잘 포장하는 언경의 교양 있어 보이는 모습이 세라는 못마땅하다. 정신적인 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세라는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그를 통해 잠재의식과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분출된다.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벌어지는 환상 씬에서는 요부로 치장한 언경이 악마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다른 공간에 살지만 자신의 과거이기도 한 앨리스가 현실의 다연을 꾸짖기도 한다.

연극의 반전은 다연의 자궁경부암이 의사의 오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루어진다. 솔직 당당한 젊은 앨리스와 계속해서 비교되던 세라는 살아있음의 기쁨을 깨달으며 앨리스처럼 당당하고 활발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진수와 언경이 실망하는 모습을 신나게 비웃는다. 연극은 다연이 삶의 의미를 되찾는 내용 외에 다른 인물들 각자의 사정과 감정도 담아내려 한 듯하다. 세라의 신비함을 사랑했던 민석은 세라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금세 꼬리를 내리고, 세라와 이혼하여 어린 아내와 사는 진수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떨어야 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우아하던 언경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다툼이 벌어지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다연과 앨리스의 연기 비중이 커, 주인공 세라 외의 다른 인물들 각자의 사정과 감정 변화는 크게 주목되지 않는다. 세라와 비슷한 비중으로 보여 지는 앨리스의 모습 역시 세라의 과거 모습이기 때문에. 아파트 내부와 아파트 밖의 복도, 이쪽 집과 저쪽 집의 공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과 그를 담아내기 위한 세 층의 무대가 인상적이다. 내밀한 공간이 형성되다가도 금세 다른 공간과 인물들이 침투한다. 입체적인 무대 구성은 등장인물들의 얽힌 미로 같은 인간관계를 표현한다. 세라의 자궁경부암은 거짓으로 판명되어 사라졌고, 세라는 새 전구를 갈면서 자신을 억압하던 과거의 기억을 떨쳐낸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 임신과 결혼, 친구와 배신 등의 통속적인 소재들은 현실에도, 극중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과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갈 뿐이다. 여자도, 남자도. 여성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하면 ‘남성이 개입된 채‘ 여성의 사랑에 대한 순수성 인식이나, 삶에 대한 독립성의 문제로 양분된다. 보통의 여성의 삶이 전면에 나올 때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 화된, 남. 여성의 본능적 차이가 실생활에서 연예공식과 유형별 타입 같은 것으로 보일 때, 나아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작품에서 남성의 폭력적,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될 때 씁쓸함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그걸 굳이 삶의 집착으로 인한 흔적으로 돌리지 않음이 이 연극의 담백하면서도 ‘여성주의적인’ 연극임을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의 선고로 현실세계와 미래의 단절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실처럼 보이는 건 상처들이다. 현실처럼 보이는 건 결국 과거의 플래시백과도 같은 과거와 현실의 그녀의 방은 무대를 양분해 서로 민감하게 결합되고 교차된다. 여기에는 무대에 관한 연극의 특수한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즉 과거는 단지 분리된 ‘사실’이 아닌 결코 분리되지 못하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 조명의 완벽한 사건 차단의 불가능성과 함께, 마치 과거의 기억에 현실의 그녀가 조작적으로 반응하는 듯 보이며, 실제로 과거는 그녀를 괴롭히는 병마의 공격과도 같다.

이미 가정이란 테두리를 벗어난 그녀에게 이미 닥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책임 및 실수는 없다. 곧 죽음의 선고는 삶을 재단하고 다시 앞으로 나갈 원동력을 적절한 삶의 기반을 상정할 수 있다. 앨리스가 여기 살지 않을 때, 현실을 진정 수용할 수 있다. 즉 앨리스는 부정적이고 환상적인 것의 상징이다. 결국 기억은 사실이 아니고 지나간 일 역시 사실 보다는 기억의 일종이다. 이러한 인간의 오묘한 생체작동 시스템은 주제적 삶의 재구성을 만들며 그녀를 해방시킨다. 임신이 상상임신이 아닌, 남자의 마음을 시험해보기 위한 수단이 됨은 사실일까? 죽음은 존재의 의미보다 큰 것으로 보인다. 그녀 주변의 사람이 불편한 관계를 제쳐두고 그녀를 다시 찾아올 만큼.. 반면에 타인에게 그 죽음이 갖는 의미를 그녀 역시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tip. 웃음이 많이 있었던 연극 같다. 죽음은 삶을 강제할 수 있다. 삶은 죽음에 종속되기 쉬우나 삶은 죽음을 책임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다. 단지 삶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삶의 끝은 있다. 언젠가는 종결점이 순간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죽음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하나의 귀결점에서 다시 그것을 반추해볼 수 있다. 죽음 앞에 우리는 삶을 숙고해볼 수 있다. 결국 삶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닐까..... 웃음이 약간 어설펐던 부분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자세하게 연극이 기억이 나지는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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