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하유상 '학 외다리로 서다'

clint 2015. 11. 9. 11:08

 

 

 

 

긴 목을 빼어들고 흰 구름 우러르며 백학이 외다리로 초연히 서 있도다.
그 모습 고고하여라. 따를 새가 없고나.
위 시조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김 노인이 즐거이 읊조리는 자작 시조이다.
위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전라도와 충청도 접경에서 몰락한 양반 지주의 후예답게 고고하게 외다리로 버티다가 허물어지는 김 노인 일가의 희비극을 리얼하게 묘파한 수작이다. 이 작품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 오는 까닭은, 철저하게 리얼리즘 정신으로 로컬 칼라를 주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수박 겉핥기식의 얄팍한 상업주의 연극에서 우리는 어떤 감흥을 얻을 수 있었던가?
허지만, 이 작품은 형식상의 사실주의와 아울러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이면과 황혼기에 접어든 인생의 내면세계를 여실하고도 음영 깊게 부각시켜 놓고 있다.
이 작품은 196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명동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던 '신협' 멤버인 이해랑 연출로 원로 배우인 김동원, 황정순 등이 출연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 당시 희곡의 리얼리즘 기수였던 하유상, 차범석, 이용찬 등이 계속 이런 사실주의 연극을 파고 뿌리를 내렸던들 오늘날 같이 국적 불명의 연극이 판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애석함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작품은 무대를 설명하는 지문부터가 사실주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무대 - 기와버섯이 성성한 고가(古家). 보통 지문으로 '기와집'하면 다 통한다. 그런데, 이 작가는 굳이 '기와버섯이 성성한...'하고 시적인 묘사를 함으로써, 몰락하는 김 노인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퇴락한 고가에서 여생을 버티고 사는 홀아비 김 노인에게는 여고 교사인 큰아들 동수와 며느리,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한 둘째 동혁, 여고 3년생인 막내딸 동희, 그리고 행랑어멈과 그 남편 왕눈이 등이 한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고 있다.

 

 

 

 

이 작품은 대체로 다섯 가지 기둥 줄거리로 주축을 이루고 있다.
1. 옛날 고리짝 장사를 하다가 능한 상술로 갑부가 된 한 마을의 삼봉 노인과 김 노인은 사사건건 갈등을 빚는다.
2. 김 노인이 한창 잘 살 때, 첩에 빠졌기 때문에, 그 부인이 대들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사건 (실은 달리 책임문제로 자살한 것임).
3. 홀아비인 김 노인이 서울 댁이란 후처를 맞아들이는 사건.
4. 김 노인의 둘째 아들 동혁이 하필이면 견원지간인 삼봉 노인의 딸 미애와는 벌써부터 사랑하는 사이이며, 미애는 이미 임신 중이라는 사건.
5. 막내딸 동희는 사실은 친딸이 아니며, 누이동생 순임의 사생아를 입적시킨 것인데, 그 동희가 행랑어멈의 남동생 명호와 연애하는 사건.
이러한 사건들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밀도 있게 전개된다.
즉, 반목하고 대립되는 삼봉 노인과의 관계는, 삼봉 노인이 중간상인을 내세워 속임수를 써서 김 노인의 선산을 매수함으로써 더욱 골이 깊어 졌다. 그런데다 둘째 아들 동혁이 그의 딸을 사랑한다기에 완강히 반대한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올라간 동혁이 오페라 작곡 현상 모집에 응모하여 타게 된 상금 500만 환을 보태, 김 노인은 역시 속임수를 써서 삼봉으로부터 선산을 재 환매하게 되지만, 미애는 결국 죽는다. 그런 삼봉 노인 같은 장사치 따위의 위에 서기 위해 김 노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손때로 찌든 족보 책을 펼쳐 들고 양반의 후예인 양 고자세로 시조를 읊조리곤 한다. 그러나 그는 시대착오로 말미암아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뻔히 스스로의 잘못을 알면서 짐짓 그러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김 노인과 신교육을 받은 그의 아들딸들과 신구세대 간의 표피적인 갈등만 그리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속사정은 '작자의 말'인 〈한국적인 우리들의 아버지〉를 보면 이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을 마음속으로는 몹시 사랑하면서도 겉으로는 나무람으로 표현되는 한국적인 우리들의 아버지. 나는 거기에서 소박하고도 순수한 애정의 한 형태를 본다. 그것은 보다 동양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는 그 이상을 겉으로 표현하려 드는 서양적인 것에 비하여 설혹 그것은 투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교묘하고도 세련된 것보다도 투박하지만 얄팍하지 않은 우리들의 아버지에 더 매력과 그리움을 느낀다. 투박하다고 해서 일일이 손때를 묻히며 만들어진 뚝배기 대신에 기계화된 공장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매끄러운 기명에 담겨진 우리들의 구수한 된장 맛이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작품에 나오는 김 노인은 꾸밈새 없는 그런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그가 큰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 조류에 도전하여 한사코 양반 계보를 내세우는 것은 당랑이 수레바퀴에 덤벼드는 격의 가당치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돈키호테와 같은 가소로운 시대착오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동정하는 데 결코 인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자신을 잘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처지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저질러진 우스꽝스런 돈키호테의 언동에도 나는 비극을 느낀다. 하물며 그런 자신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김 노인에게 나는 비극을 느끼지 않을 수는 도저히 없다. 나는 이 작품에서 신구세대의 문제 같은 것을 떠나서 선량하면서도 불우했던 우리들의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으로 오직 김 노인의 애환에 일희일우 하고 싶다. 그것이 그를 위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막내딸로 호적에 올려놓은 동희는 사실은, 김 노인의 누이동생 순임을 죽은 부인이 김 노인 몰래 서울로 공부하러 보냈는데, 어느 남학생의 사생아로 낳은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남들은 김 노인이 기생과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부인이 대들보에 목매 자살했다고 오해한다. 결국, 그런 오해도 풀리고, 마지막에 순임은 모정을 억제치 못하고 동희를 친딸이라 불러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애절한 사연도 있다. 후처인 서울 댁은 1막 2장에 등장한다. 김 노인의 말벗인 서 영감의 소개로 양반집 후예이고 30년 수절 과부라는 서울 댁의 선을 보고 후처로 앉힌 것이다. 서울 댁은 예절 바르고 상냥한 여인이었으나, 머리 큰아들 딸과 며느리 등 많은 식솔들 속에 끼어, 새어머니로서의 운신이 매우 고달팠다. 갖가지 시련 끝에 김 노인이 졸도하여 죽자, 서울 댁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려 한다. 그러는 걸, 아들 동혁이 평생 친어머니처럼 잘 모시겠노라고 한사코 만류한다.
이 작품은 이렇게 김 노인 일가의 이면 세계가 복잡다단하게 얼크러져 있지만, 작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시종 김 노인의 일상생활의 애환을 담담하고 짜임새 있게 구축해 놓았다. 한국적인 그 정관의 세계야말로, 가히 〈빚꽃 동산〉을 쓴 체홉의 세계와도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1950년대 전라도와 거리가 멀지 않은 충청도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몰락한 양반 지주인 김노인은 가문의 명예와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중시하고 언제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족보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물이다. 육순을 넘긴 김노인이 명문 집안의 후손으로 30여년 동안 수절해 왔다는 서울댁과 재혼하려 하자 둘째 아들 동혁이 김노인의 첩 때문에 친모가 자살한 것을 떠올리며 반대한다. 작곡 공부를 하는 동혁은 자신의 선산을 사서 벌목으로 부자가 된 삼봉의 딸 미애를 사랑한다. 하지만 김노인은 상놈의 딸이라며 학처럼 고귀한 양반 집안에 미애를 데려올 수 없다며 반대한다. 김노인은 동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댁을 집에 들이고 동혁은 집을 나간다. 한편 막내딸 동희는 집안일을 돌보는 어멈의 동생 명호와 사랑에 빠져 김노인의 노여움을 산다. 처녀시절 토목기사와 연애를 했다가 김노인이 강제로 다른 곳에 출가시켰던 큰 딸 동숙은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다. 상심한 김노인은 말벗인 서영감에게 실상 동희도 자신의 딸이 아니라 누이 동생 순임이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에 어느 남학생과의 사이에 낳은 자식으로, 동혁의 모친이 자살한 것은 바로 자신이 고집하여 서울로 유학시켰던 시누이의 사단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동혁이 5백만환 현상 오페라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진다. 동혁은 상금으로 선산을 사서 아버지에게 드리겠다고 다짐한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 가운데 동혁이 작곡하고 미애가 부르는 아리아가 라디오를 통해 나오다가 그만 미애가 졸도하여 죽음에 이르고 만다. 딸이 죽은데다 다른 사람의 중개에 넘어가 김노인에게 산을 팔은 삼봉은 홧김에 서울댁이 무당 출신임을 폭로한다. 김노인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삼봉의 난동에 쇼크를 받아 쓰러진다. 그는 죽어가면서 서울댁의 고운 심성을 칭찬하고 서영감에게 동희의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다. 동숙에게는 재혼을, 동희에게는 명호를 허락한다. 생전에 동혁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음을 밝히며 불필요한 족보는 무덤 속에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한 후에 숨을 거둔다. 김노인의 장례를 치른 후, 큰 딸 동숙은 역시 이혼하고 돌아온 옛 애인인 이기사와 다시 맺어진다. 한편 며느리인 서울댁을 차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를 눈치챈 서울댁이 스스로 떠나려 하자 동혁이 서울댁을 모시고 살겠다고 나선다. 서영감은 동혁에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와 첩 때문은 아니었다는 사실만을 밝혀둔다.
실제로 김노인은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한국적인 아버지 상이다. 그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가문의 전통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도전을 감당하면서 그들의 과오까지를 자신의 책임으로 감수해야 하는 과도기적 시대의 속죄양이다. 겉으로는 자식들에게 엄격하고 완고한 고집불통의 늙은이지만 실상은 집안의 모든 재난과 불행을 혼자서 다스려야 했다. … 학처럼 고고하게 살기를 원했으나 가슴을 온통 찢기고 할퀴인 채 죽음을 맞이한 김노인은 생전에 가장 애지중지했던 족보를 무덤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는 불합리한 전통적 인습으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가치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와 함께 무덤 속에 묻힌 전통은 영원히 사장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로 남아 그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정신적 지주가 된다. 김노인은 뜨거운 사랑을 내면적으로 승화시키는 동양적 영혼의 화신이자 굳은 지조와 자존심을 지켜 가는 고유의 선비 정신을 육화한 우리 모두의 그리운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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