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영진의 삶과 죽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규명한 작품이 「촛불의 환상」이다.
희곡 및 시나리오 작가로서 대표희곡 「맹진사댁경사」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1974년 10월 29일 이대부속병원에서 타계한 인간 오영진은 예술가로서 또는 정치가 및 민족주의자로서 생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그의 말년은 고독과 질병 특히 시대적 정신질환으로까지 치달아 끝내는 비참한 일생을 마친 숭고한 한국인이었다. 작가 김상열은 그의 후학의 입장에서 「숭고한 예술가이며 철저한 민족주의자인 한 사람의 영혼이 그가 태어난 시대적 정치상황에 의해서 어떻게 파멸되고 타살되어 가는가」하는 시각에서 그의 삶과 죽음을 무대위에 논증한다.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인간 오영진의 예술과 인생의 연극화는 그가 한국의 대표적 희곡작가였기 때문에 더욱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으며 특히 정치의 도덕성과 권력의 타락시대에 사는 모든 지성인들에게는 아픈 자화상이 되리라 본다.
막이 열리면 「오영진 일생」을 촬영하는 스튜디오 1948년 그를 암살하려고 권총을 쓴 암살자가 해설자가 되어 그의 시각에서 본 오영진을 피력한다. 이때 스튜디오는 갑자기 정전이 되고 「오영진」이 어둠속에 촛불을 들고 나타난 감독에게 보다 더 자세한 진실규명을 위해 동참하게 해줄 것을 간청하고 스튜디오 밖에서 서성거리는 생전의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허풍만, 맹 진사, 입분이, 이중생, 한네, 최승희, 기요꼬, 허생 등을 불러들여 과거의 재현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때로는 조만식, 안창호, 김일성, 박정희 등 역사의 실제 인물들을 맡으며 극중극 형식으로 오영진의 성장과정과 심적 변화 그리고 내면의 갈등이 전개된다. 연극형식은 촬영장의 카메라 및 보조기재들을 이용한 촬영장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현재와 과거를 자유자재 왕래하게 하였으며 오영진 일생을 다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오영진」의 수기와 증언과 생존해 있는 미망인 「김주경」 여사의 도움말 등을 참고한 인간 「오영진」의 실제모습과 작가 김상열이 투시한 창작된 「오영진」이 한 무대에 공존하는 판타지 수법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있다. 또한 「오영진」작품의 인물들이 「오영진」과 토론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서 「오영진」을 객관화 시킨 시각에서 그의 진면모를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영진
1916년 12월9일 평양에서 민족운동지도자인 「오윤선」 장로의 막내로 출생한 「오영진」은 어려서부터 그의 사랑채에 회의차 자주 모이던 안창호, 조만식, 여운형, 김성수 등 민족 지도자들의 수발을 들며 민족주의자의 자질을 기른다. 특히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1938년 경성제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는데 그것은 조선문학이 일제에 의해서 말살되리라는 식민지 학도의 저항으로 이를 택한 것이다. 그는 가난과 인습의 질곡에 갇힌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하고자 결심하고 일본에 건 너가 영화수업을 하고 돌아와 많은 영화평론 및 이론을 발표한다. 대중을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중매체를 택하게 된 것이다. 1942년 처녀 시나리오 「배뱅이굿」을 발표하고 이어서 「맹진사댁의 경사」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으나 일제하에서 그는 좌절의 시대를 보낸다. 해방이 되면서 조만식을 따라 평남건준과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지만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당들에게 박해를 받는다. 공산당이 득세하여 암살과 모반이 북쪽을 휩쓸기 시작하자 오영진은 두번에 걸쳐 김일성을 면담하여 그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쓴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1947년 죽음을 무릎 쓰고 월남하여 반공일선에 나서나 이듬해에 밀파된 공산테러리스트에게 피격 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전쟁 중에 그는 월남한 문예 인들과 함께 창작활동 및 문예 출판 사업에 심혈을 기우린다. 자유당시절 그는 예술가로서 각종 국제행사와 하버드대학 등의 세미나 및 문화시찰에 분주히 나선다. 인간 「오영진」이 정신적으로 시련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5·16쿠데타와 그 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이다. 장면내각의 특별고문까지 지낸 그가 「박정희」의 간청에 의해 국가재건 최고회의 기획위원 및 자문위원직을 맡아 문화정책에 참여하나 점차 군벌들의 정치야망이 들어나자 사퇴서를 내던지고 정치와 단절을 한다. 그러나 철저한 반일주의자인 그는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 한일외교와 그걸 별미로 한 청구권의 구걸행각에 분개하여 공개서한을 당시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등 반독재 반 유신 운동을 전개하고 청부전쟁인 월남 파병을 극렬히 반대하고 나서나 모두 좌절되고 만다. 그는 유신정권과 맞서기 위해 조선 민주당재건에 앞장서나 정보정치의 압력으로 무산되고 밀려들어오는 일본자본과 그들의 경제침략 그리고 일본과 결탁하려는 매판 자본가들을 질책하나 무위로 돌아간다. 그는 1970년 초부터 심한 우울 증세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정신질환의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 오영진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세 가지의 무서운 강박관념이 있었으며 그것은 「김일성」 의 남침, 「박정희」의 부도덕성 그리고 「히로히토」의 재침략에 대한 무서운 위기의식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아빠빠를 입었어요.」 「동천홍」등의 작품을 통해서는 일본의 재침략의 경고를 「허생전」「모자이크게임」「해녀 뭍에 오르다」 등의 작품을 통해서는 박권의 정책실패와 권력의 부도덕성을 질책하고 「무희」와 「살인명령」등을 통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허구와 실체를 규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예술가와 정치가 그리고 민족주의자라는 삼각변 선상에서 항상 저항과 방황을 하였으며 말없이 굴종 당하는 국민들에게는 깊은 연민으로 앞날을 걱정하던 중 정신질환은 더욱 심해지고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정신질환을 치료키 위한 방법으로서 「사이코드라마」를 집필하는 중 1974년 10월29일 이대부속병원 정신신경과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우천 선생 연보
1916. 12. 9: 평양부 ?리 5번지서 민족운동지도자 오윤선(吳胤善) 장로의 3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28. 3. :태정사립고등 보통학교에 입학
1930. 4. :평양공립고등 보통학교 제3학년에 전입학
1933. : 경성제국대학 상과(문과) 에 입학
1935. 3. :성대 상과를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교 조선어 문학과로 진학
1936. :동인지(성대문학) 을 창간하여 단편소설(일문) 4편 (<진상>·<거울>·<친구의 사후>· 언덕 위의 생활자>) 를 발표
1937. 7. :처녀 평론(영화예술론) 을 조선일보에 발표.
1938. 3. :(경상여성의 내방가사) (졸업논문) 으로 대학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받다. 9월 도일하여 동경에서 영화 연구
1940.10. :귀국. 12월 김주경(金周敬) 과 결혼하다. 조선영화주식회사 문예부 촉탁. 그 뒤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촉탁(무급) 을 위촉받다. 같은 때에 가친이 경영하는 숭인 사립 상업학교 강사 겸 이사장(가친)의 비서(무급) 로 근무.
1942. 4. :시나리오<배뱅이굿>(<국민문학>지 일문) 발표.
1943. 12. :「조선인 학종 지원 병제」 반대운동에 종사하다가 일경에 피검되다.
1945. 8. 17:자택에서 조만식(曹晩植)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다. 10월. 평양예술문화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자유주의적 문화운동에 참가하다. 11월 3일.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상임위원 및 조만식(曹晩植) 당수의 측근으로 일하다.
1946. 1. :모스크바 3상 회담에 반대했기 때문에 조선민주당은 공산당에 의하여 윤극으로 개제되어 지하운동에 종사하다. 3월. 숭인 중학교 강사로 복직.
1947. 11. 7:해주 경유. 서울에 도착
1948. 7. 10:서울에 밀파된 공산당 테러리스트에게 권총 피격됨
1949. :10월 「연극 학회」 창설. 간사에 취임하여 전국 대학연극 경연대회를 개최. 많은 신인을 배출하다. 한국문화연구소를 창설. 기획위원으로 취임. 작품 활동 : 희곡<정직한 사기연>(단막) 이 정법대학에 의하여 공연됨. 5월 희곡<살아있는 이중생 각하>(3막) 극단(신협) 에 의하여 공연.
1950. 1. :서울 예술학원 강사로 취임.
1951. 3. :서울 국립대학(전시연합대학) 강사로 취임. 6월 한국시청각교육회 조직 상임간사로 취임. 10월 「문예」 사무국 차장에 취임. 작품 활동:뮤지컬 드라마<오곡타령>(미발표) .
1952. :9월 유네스코 주최 세계예술회의 (어 베니스) 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귀로에 파리 소재 유네스코 본부와 세계문화 자유회의 국제사무국 및 일본 사무국을 방문하여 저명한 반공인사들과 환담.
1953. 4. :2월 미 국무성의 「Leader's Grant」로 도미·3개월간 대학·연극·영화·라디오 계를 방문하다.
1954. 1. :귀국. 7월 국제 P. E. N클럽 한국 본부에 회원으로 가입. 12월 예술원회원으로 피선.
1957. 4. :<시집가는 날>(원명<맹진사댁 경사>) 문교부 및 영화평론가 협회 선정 최우수각본상. 제4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희극상 수상.
1958. 1. :국제 극예술 협회(ITI) 한국본부 부위원장에 피선. 작품 활동:시나리오<인생차압><살아있는 이중생 각하>개원) 부일영화<각본>상 수상<종이 울리는 새벽><자유문학상>논평<영화평론가의 위치와 행동><작가가 지녀야 할 도양적 책임><영화의 문변><영화의 초장기와 그 발전 과정>수필<농촌단상>외 4편.
1959. 6. :ITI 제8차 총회(어 헬싱키) 에 한국대표로 참석. 7월 하바다드대학 하계국제 세미나(어 캠브리지) 에 참가.
1961. 2. :제8회 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마닐라 행. 4월 국무총리 문화담당 특별 고문으로 위촉 받음. (1개월간 재직) 6월 국가재건 교고회의 기차위원 자문위원으로 위촉됨. (재직 1개월)
1962. 6. :조선민주당 창당 상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선.
1963. :동아 연극상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의 위촉을 받음.
1964. 11. :서울특별시 문화위원으로 위촉 받다.
1967. 작품 활동 : 희곡<해녀 뭍에 오르다. (<신동아>지 게재. 자유극장 공연. 한국연극 영화상 수상) 뮤지컬 드라마<시집가는 날>(<원작<맹진사댁 경사>) 외 4편.
1969. 5. :<맹진사댁 경사>(실험극장 공연)
1970. :작품 활동 : 희곡<아빠 빠를 입었어요.>(<사상계>지 소재 : 서울대학교. 덕성여대 공연) TV드라마<도산 안창호>제1부<8회·<기러기>지 연재) 희곡<허생전>(현대문학지 연재) 실험극장 공연. 서울 신문 문화대상 (각본) 및 한국 연극 영화 각본상 수상)<모자이크 게임>(12장·<신동아>지 개재) 외 평론 2편 번역 1편.
1971. :작품 활동 : 희곡<나의 당신>(단막·<현대문학>지 연재)
1972. :작품 활동 : 시나리오<한네의 승천>(<현대문학>지 연재)
1973. :작품 활동 : 희곡<동천홍>(3막 4장, 실험극장 공연)
1974. :작품 활동 : 사이코드라마<며느리><부부><누나><무희><섹스>4편 완성. 이후 모든 공직에서 떠나 창작에 전념하시다 10월 심장마비로 영면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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