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제인 테일러 '위뷔와 진실위원회'

clint 2022. 6. 2. 17:08

 

 

진실과 화해

1996년 초,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최초의 범인종적 국민투표를 실시한 지 거의 정확하게 2년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가 출범하였다. 위원회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것은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 시대에 자행된 인권침해 사건들의 가해자, 피해자, 혹은 생존자들로부터 증언을 이끌어내어 전국민적인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차를 밟는 목적은 여러 가지이다.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고 고통받은 자들에게는 보상을, 그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일들에는 사면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목적 중 하나는 위원회를 통해 전 국민적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맥락을 창출하는 것이다. 위원회를 보면 개인의 서사가 더 큰 국민적 서사를 대표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개인적 슬픔과 상실, 승리와 위반의 이야기들은 현재 남아공의 근대사를 대신하고 있다. 역사와 개인사가 합쳐지게 된 것이다. 이는 중대한 변화인데, 왜냐하면 민중 저항이 이루어지던 과거 수십 년 동안 개인적인 고통은 민중 해방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가려 감추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개별 증언들속에서 기억과 애도를 구조화하는, 언어와 사고의 매우 사적 인 패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글 - 제인 테일러

위뷔와 진실위원회의 기원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것들은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와 다른 기획들로부터 비롯되었고 어떤 것들은 연출자 윌리엄 켄트리지에게서 나왔다. 1996년 폴트 라인 (Fault Line)이라는 일련의 문화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 운동은 학술 및 예술회의, 학생 라디오 프로젝트, 지역 예술 주도 및 TRC 관련 미디어 워크샵 등과 함께, 보상, 기억과 애도 및 전쟁 범죄와 관련된 미술전시, 남아공과 독일, 칠레, 이스라엘, 노르웨이, 네덜란드, 포르투갈, 캐나다, 수단 및 짐바브웨 시인들의 시 낭송회를 포함한 다양한 이벤트 프로그램이었다.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우선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둘러싼 논쟁을 용이하게 풀어 가기 위하여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다. 예술가들이 배신과 사디즘, 마조히즘, 기억 등의 문제를 빈번히 다루고 있다는 전제하에, 나는 예술이 이 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무시한다면 엄청나게 가치 있는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나아가, 왜 우리는 서로 배신하고 학대하는가와 같은 어렵 고도 폭발력이 있는 질문들이 예술을 통해서 제기된다면, TRC 자체의 취약한 법적 정치적 과정을 보다 굳건하게 다질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느낌이었다.

 

 

알프레드 자리와 그의 위뷔왕과 비교

위뷔 시리즈의 최초의 작품은 프랑스의 극 문화에서 전설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888년 알프레드 쟈리는 친구인 앙리 모렝의 짧은 해학극을 각색하였는데, 원작은 이들의 과학 선생님을 폴란드의 왕에 비유한 것이었다. 쟈리의 작품은 인형극을 위해 착상되었다. 8년 후 위뷔왕(Ubu Roi)이라는 완성된 개작이 파리에서 대중 공연을 통해 최초 상연되었다. 이 공연 직후 극장에서 일어난 폭동은 쟈리 일대기의 주된 레퍼토리이다. 그러나 위뷔의 후속편인 "오쟁이진 위뷔(Ubu Cuckolded)” 요술에 걸린 위뷔(Ubu Enchanted)”는 둘 다 3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쟈리의 생전에는 공연되지 않았다. 위뷔왕의 내용은 거드를 많고 탐욕적인 위뷔의 정치적, 군사적 범죄 경력을 묘사한 것인데, 위뷔는 맥베드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서, 아내와 함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려고 시도한다. 중심 인물인 위뷔는 세상에 대한 유아기적 이해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탐욕적인 자기 만족의 영역에 살고 있다. 연극에는 외설적인 농담이 가득하고, 그 유명한 연극 시작 대사 (씨발!)는 의심할 바 없이 최초의 상연 당일 밤 프랑스 관중의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일조 하였다. 위뷔의 무기는 똥칼과 똥갈고리이며, 왕홀은 관행적으로 우리의 공연에서 보게 될 소도구인 변기 솔이 사용된다. 극중 인물들의 이름도 형형색색이고, 극 중 위뷔는 자신의 양심을 변기에 쳐박아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유아기적 발작을 지켜보는 관객은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즐거움은 쟈리가 발명한 희극()적 상황들이 어떠한 결과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위비의 정치적 열망이 아무리 잔인하고 인간관계가 무도할지라도, 이는 그 자신이 주변에 만들어 놓은 소극(笑劇)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중요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라도 만족시키려 하는 우리의 가장 유치한 분노와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일 따름이다.

 

 

"위뷔와 진실 위원회"에서는 이 인물을 사용하였고, 쟈리에게서 일부 빌어 온 소극 스타일을 사용해서 그의 성격을 묘사하였다. 언어는 일부러 고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위뷔를 멀리 떨어진 어떤 시대의 형식과 의미를 지닌 세계에 사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인물은 새로운 체제, 즉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세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위뷔는, 남아공 역사 속의 어떤 특정 인물을 묘사한다기보다는 특정 측면, 특정 경향, 특정 변명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때로 우리가 TRC 청문회에서 들었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목소리들을 대변한다. , 그의 언어적 세계를 진실과 화해 과정에서 발생한 실제 증언으로부터 도출된 언어와 비교하였다. 이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자행된 잔학 행위들의 생존자와 가해자들의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 청문회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사면을 받으려는 자들과 보상을 요구하는 자들의 증언 사이의 불일치를, 가공할 잔인성이 말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한 행동이 인간의 삶에 가져다줄 충격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이 그렇게 빈번히 행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전율하게 하였다. 통상적으로 가해자들은, 강력히 부인해서인지 혹은 윤리적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가해자들은 희생자 혹은 생존자의 가족들과 대면했을 때,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처럼, 그들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놀라워했다. 이 작품은 이 극을 통해서 위뷔라는 인물을 소극적 맥락 밖으로 끄집어내어, 행위들이 실제로 어떤 결과들을 야기시키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위뷔가 사용하는 인위적인 고어체의 언어, 운율과 말장난, 과장과 불경스러움들은 주로 TRC 청문회를 통해 기록된 증인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자세하고 세밀한 묘사 들과 대비시킨 것이다. 위뷔는 그의 조국에서 자신이 공격했던 자들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인과관계가 다른 표현 양식을 통해 극중에 기록되는 것과 같으며, 우리가 채택한 공연 스타일들을 관통하고 있다. 위뷔와 TRC가 만나는 이러한 구조는 우리의 극에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매우 특수한 연극적 결과들도 존재한다. 아마도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가 쟈리가 사용한 소극(笑劇)이라는 장르의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 나타난 윤리를 생각하면서 희극(戱劇)적 관행들을 통해 인권침해를 다루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하여 학생들과 긴 토론을 벌인 기억이 있다. 나는 지금 그때보다 훨씬 복잡하게 생각한다. TRC는 분명히 기념비적인 과정이고, 그 결과를 해명하는 것은 수 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것은 매우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파급력은 분파들에 따라 다르게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스며들었다. 예를 들어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그것이 마을 교회당에서 벌어져 인구의 다수를 끌어들였지만, 대규모 도심에서는 다른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밀려 주변화되었다. 우리 대부분이 TRC로부터 얻은 정보의 많은 부분은 상업 방송과 시트콤, 주간지 프로그램 등등을 통하여 많이 소통되었다. 혼돈과 전이가 되풀이되면서 분노와 동정심 혹은 경악의 다양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정보가 과적(過積)된 상황에서는, 막연한 슬픔이라는 내면적 충격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분명한 도덕적 분노의 감정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극을 통해 모호함을 연출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상실과 고통을 겪은 경험에 관한 모호함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에 관한 모호함이다. 즉 우리 자신의 반응이 문제시되는데, 왜냐하면 결국 우리 속의 무엇이 다른 사람의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인지를 질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이야기를 쫓아가게 만드는가. 우리는 위뷔의 이야기를 쫓다가 그의 가족 드라마 속으로 유인되고, 그의 자기만족적 논리와 마주치게 된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때때로 그의 말도 안 되는 익살을 조롱함으로써 그와 얽히게 되는데, 이 조롱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적 구조의 문제를 제기한다. 위뷔와 진실 위원회 는 제목이 암시하듯 위뷔를 중심 인물로 설정하고 위원회를 이 주인공과 대립시킨다. 따라서 우리 대행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악의 대행인이다. 왜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했는가? 서사는 극중 인물에 의존한다. '행하는 자의 이야기는 행위를 당한' 자의 이야기보다 설득력 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에 대한 하나의 이유이다. 다른 이유는 위원회 자체의 성격에 의한 것으로, 위원회는 희생자들을 인권 청문회의 중심인물로 내세웠다. 우리가 계속해서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부당한 고통을 역설하는 방관자들의 이야기이다. 이는 어떤 수준에서 는 적절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적 전쟁에서 '의식적인 참여자들'로 설정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 경향을 초래했다. 우리는 지략있고 정력적이며 유연한 정치 활동가인, 아파르트 헤이트의 반대자들의 설명은 강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슬픔의 논리 속으로 내던져지고, 의미 없는 폭력이 만들어 낸 재난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위뷔와 같은 가해자가 우리의 주인공이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와 같은 인물은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는 친숙하면서도 전혀 이실적인 인물이며,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간적이다. 그는 가장 극단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진부한 것에 이르기까지, 의미의 체계 전체를 제자리에 유지시키는 한계점(limit term)이다. TRC는 희생자의 사례들을 기록하고 가해자의 사면 신청을 들어주는 이중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한편,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러한 인권 학대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진단할 수 있는 맥락을 창출하는데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위뷔의 이야기는 어떤 수준에서 개인적 병증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 인종, 계급, , 종교 및 근대화의 관계에 대한 범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