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제주도 여행기
아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려는 남편은 짧은 여행을 계획한다.
이들의 결혼 40주년을 기념하여 아들이 보내준 제주도 여행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관광지에서의 모습은 단순히 여행지에서 마주 대할 수 있는
밝고 환한 모습의 현지인과 여행객들의 의례적인 만남만은 아니다.
거센 바람과 파도를 이기며 살아온 섬사람의 끈질긴 생명력 속에
나름의 사연을 가슴에 담고서도 한가로운 듯 풍광들을 돌아보는
육지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어 묘한 칵테일을 만들어 낸다.
지나온 세월의 깊이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잦은 의견 차이로 티격태격거리는 노부부의 여행지에서의 짧은
생활 속에서 이들이 함께한 세월이 아련하게 추억으로 곱씹어진다.
살아온 날들보다 얼마 남겨지지 않은 날들을 보다 아름답게 마무리하려고
노력하는 노부부. 이들에겐 낯선 곳에서 부딪치는 새로운 만남이 여행의
재미와 설렘 그리고 깨달음을 전해준다. '인생'이라는 여정처럼
이들의 마지막 여행에서도 새로운 인연은 계속되는 것이다.
관광 안내를 맡은 젊은 택시기사가 아들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고아로 자라온 그에게 애틋함과 살가움을 느낀다.
술에 취해 불쑥불쑥 펜션 방문을 열어젖히는 불청객 아가씨의 감춰진
슬픈 사연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미지의 항로에서 마주하게 되는
전생으로부터의 긴 인연의 긴 끈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도착지점에 다가설수록 인생이 또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느낌들을 던져준다. 40년의 세월 동안 기쁨도 슬픔도 함께하며 아옹다옹하는 노부부의 삶의 모습이 톡톡 튀는 재미와 더 불어 잔잔하고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수묵화의 느낌처럼 아련하게 펼쳐진다. <옆에 있어 드릴게>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려는 남편이 여행을 위해 제주도 팬션에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에게는, 또는 제주도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가족관계가 결핍되거나 또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만나고 엮이고 헤어지면서 벌어지는 우리의 소소한 인생 같은 작품 <옆에 있어 드릴게>는 오랜 세월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온 노부부의 아옹다옹하는 정겨운 모습과 함께 살아온 날들 보다 얼마 남겨지지 않은 날들을 보다 아름답게 마무리하려고 노력하는 ‘인생’의 참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연극평- 김기란
작품은 등장인물 중 절반이 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대파국을 향해 돌진하기 위해 필요한 갈등(아마도 타인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는)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명되기 때문에 집약적인 대파국을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역부족이다. 육체적 고통,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남편의 괴로움, 죄의식에
시달리는 여자,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용이, 밥 먹는 것도 귀찮다면서 돈에 집착하는 생활력 강한 노파,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 이들은 왜 절대화된 무대 위 현재 속에 호명되어 불려나온 것인가. 이들이 무대 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갈등을 함께 우리들의 문제로 공유하고 그것을 사건이라는 가시적 형체로 무대 위에 구축하기 위해서이
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 함께 생활을 나누는 ≪옆에 있어 드릴게≫의 인물들은 집약적인 관계와 갈등을 표출하지 못했다. 그들은 100분의 공연 시간 중 절반 이상을 자신들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작은 무대 구석구석 배정된 자신의 공간 속에 불확실한 개별자로 존재했다. 작은 무대 구석구석은 여러 공간으로 분할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이들 인물들이
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는 자신만의 공간 속에 칩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살 혹은 애정이라는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한다는 연관 관계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면 작은 무대를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 산만하게 구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물들은 공연의 대부분을 각자의 문제에만 집중했기에 각각 자신들의 공간을 필요로 했고 이들이 나누
는 대화는 단일 담화적 성격을 띤, 안착할 구체적 정황을 찾지 못해 연관 없이 떠도는 독백 같은 것으로 표현되었다. 암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내, 그런 아내와 여행을 떠나온 무뚝뚝한 남편, 이들 부부는 일 년 전 사고로 외아들을 잃었다. 부부의 방으로 찾아든 낯선 여자, 그녀는 죽은 아들의 여자 친구다. 이들 사이에 끼어든 젊은 택시기사는 여자에게 은근한 관심을 보인다. 도무지 대파국을 향한 사건의 연쇄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연관 관계를 맺지 못할 것 같던 이들은 여자가 극 후반에 자신이 죽은 아들의 여자 친구라는 정체를 부부에게 드러내는 뜻밖의 반전을 통해서 난폭하게 관계를 맺는다. 이를 위한 극작법 상 보조 장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실수를 빙자해 세 차례나 부부의 방에 찾아들어간다. 그 이유는 여자의 정체 고백으로 분명해진 셈인데 그것은 극 관객들의 추론을 통해 가능한 이해일 뿐 여자가 부부의 방을 자신의 방으로 착각하고 찾아들었던 그 장면은 이미 1시간 전에 관객들의 뇌리에서 지나가 버린 장면이다. 지나간 장면을 되돌려 극적 긴장을 느끼기는 어렵다. 1시간 전, 관객들은 젊은 여자가 왜 이런 반복되는 실수를 하는지 궁금했겠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니 그녀의 히스테릭한 행동과 대사를 지루하게 관찰할 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어텍스트의 이야기는 되돌려 다시 읽으며 음미할 수 있지만, 연극은 현장에서 그때그때 느끼는 공연예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내장한 반전의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반전은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반전을 통해 부부와 여자의 관계를 드러낸 것이 이들이 선택하는 자살이라는 대파국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 채 공연은 막연하게 끝난다. 관객들에게는 자살이라는 설득력 없는 자극적인 결말만이 남겨진 셈이다. 인물들의 대화나 극 후반부의 반전만으로는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충분히 설득력있게 전달하지 못하니 긴장을 유발하기 힘들었고, 그 결과 인물들의 자살이라는 대파국은 과부화된 결말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결말은 극적이었지만 실제 공연은 전혀 극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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