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반 '황무지'

clint 2021. 11. 25. 09:20

 

 

작품해설- 김화수

황무지라는 작품은 사실 희곡보다는 연극공연을 먼저 접했다.

명동 창고극장에서 김호태 선생님이 현대극장 기획으로 열연했던 작품이다. 암울한 1970년대 말의 서울, 황무지 같던 유신 시대의 종말을 6개월 정도 남겨 놓고 있을 때였다. 1979년 작가는 도시의 황폐화를 바라보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T. S. 엘리엇의 장편 시 황무지를 연상시키는 모노드라마이자 실제로 엘리엇의 시가 많이 인용되어 있다. 당시 공연을 보고 나서 대성당의 살인에 나왔던 대사, ‘우유 없는 여름의 아이, 불 없는 겨울의 노파, 물방앗간에서 능욕당한 소녀는 가장 힘들고 무거운 젊은 우리들의 상황을 표현한다 싶어서 한참을 많이도 인용했던 글귀였던 기억이 난다. 또한 황무지의 시에 나왔던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용맹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감싸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그리고 그런데 당신 저편에 있는 저분은 누구요?" 도 오랫동안 외우고 다닌 대사 중 하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요즈음 다시 작품을 읽어보면 또 다른 선생님의 메시지를 듣곤 한다. 이 마지막 대사를 보자.

, 이제야 알겠어. 그분은 내 맘 속에 있는 게 아니야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그분은 이미 그분이 아니야. 우리에게 퍽 인자한 분이었지. 언제나 다정한 눈길을 주셨어. 등도 두드려 주셨거든. 그런 기억들일랑 죽여버려, 죽여야 된다고. 이 황량한 들판의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그분은 죽어야 돼. , 보라고. 너와 나 사이에 이미 그분은 와서 함께 걷고 있잖아? 그렇지. 아니야. 처음부터 돌아가시지 않았는지도 몰라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계셨어. 그분은 우리들 사이에 항상 있어 왔어. 그렇죠, 선생님. . 미소 짓고 계시잖아? 나와 말 사이에서 자작나무와 다람쥐 사이에, 구름과 달, 파도와 바위, 산과 강, 키에르케고르와 레귀네, 바람과 안개, 하늬와 샛바람, 거북이와 토끼, 나와 너 사이에서 그분은 살고 계셨어. 살고 계셨어. 그분은 살고 있어"

멀리 있는 신(), “침묵하는 신()"이 아니라 내 곁에서 숨 쉬며 미소 짓는 신()인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젊음이 너무 무거웠던 내게는 그런 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스무 살의 어리디어린 나는 신()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황무지는 황무지일 뿐이고 구원의 메시지는 그냥 언어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계시로서의 신은 이렇게 내 가까이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공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나는 선생님의 이 작품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작가의 글

내가 맨 처음 모방하고 싶은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그의 행적이었다. 몇편의 단막 희곡을 써서 책에 발표하고 공연도 했는데 주위의 평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글 또는 하는 연극이 특정인이나 종교의 진리를 전하는 도구밖에 될 수 없는가? 그래서 현실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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