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가 수많은 영국 사극을 쓴 반면에, 말로의 유일한 사극으로 불릴 수 있는 〈에드워드 2세〉는 쿠리야마(Kuriyama)가 지적하듯이 사극으로 평가할 것인가, 한 개인의 비극으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2세〉를 진정한 사극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은 클로드 서머스의 지적처럼 〈에드워드 2세〉가 튜더왕조의 정치적 신화를 구성하는 섭리적 역사관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즉, 에드워드는 신의 섭리에 따른 절대적 왕권의 권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불행한 개인의 모습만을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말로가<에드워드 2세〉의 출전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진 홀린셰드(Holinshed)의<연대기>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에드워드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불안한 통치를 했으며, 왕의 권위가 확립되지 못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튜더왕조의 정 통성과 왕권강화를 위한 역사쓰기에 매달렸던 엘리자베스 시대에 말로가 영국의 역사에 근거한 작품을 쓰면서 당대의 지배담론인 섭리적 역사관을 전달하는 것을 거부하고, 불행하고 나약한 왕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또한 수많은 과거 영국의 왕들 중에서 왜 하필 끔찍한 최후를 겪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에드워드 2세를 선택했을까? 우리는 이러한 말로의 선택이 그의 탈신비화 글쓰기 전략의 일환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당대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와 달리 공식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 만, 말로의 〈에드워드 2세>는 〈리처드 2세〉보다도 더 큰 논쟁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 로저 세일즈(Koger Sales)의 지적처럼, 결국 극의 결말에서 에드워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왕권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점과 에드워드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모티머가 살해당한다는 점에서, 당대 지배계층이 이 작품을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품에서 말로가 왕권의 권위 자체를 조롱하고, 계급질서의 우두머리인 왕으로 하여금 질서와 안정을 위협한 반역 죄인이 겪어야 할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죽음을 겪게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절대적 왕권의 신화가 강조되던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에게 왕의 동성애도 충격적 사건이지만, 왕위찬탈과 왕의 시해는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죄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충격적 사건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초반부터 국가의 안위나 통치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로지 개비스톤에 대한 사랑에만 집착하는 에드워드 왕의 모습은 왕으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의 고통과 비극은 스스로 초래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오로지 개비스톤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서 왕의 지위를 즐거워한다고 말할 정도이며, 개비스톤을 배척하는 귀족들을 무시하여 그들을 분노케 한다. 또한 한꺼번에 여러 가지의 최고 직책을 개비스톤에게 수여하는 무모함을 보이는가 하면, 왕비인 이사벨라마저 미워하여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에드워드는 왕권보다는 개비스톤에 대한 사랑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에겐 왕국도 왕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개비스톤의 사랑만이 그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임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왕으로서의 직분이나 역할보다 도 오직 개비스톤의 애정만을 중시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은 왕권에 부여된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집착하는 개비스톤은 브라이트의 지적처럼 결코 순수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왕을 이용하는 마키아벨리 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도 천한 신분이면서 세 사람의 가난뱅이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왕을 즐겁게 할 육감적 볼거리를 준비하지만 이것은 모두 "말 잘 듣는 왕을 자신의 마음대로 끌어당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개비스톤의 실체도 간파하지 못하고 그에게 빠져 있는 어리석은 에드워드의 파멸은 도덕적 타락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전통적 왕권의 권위 질서에서 벗어난 에드워드의 극단적 동성애의 재현은 토마스 카텔리 (Thomas Cartolli)의 지적처럼 반 권위적 무질서를 부각시키는 카니발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개비 스톤이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그를 향한 에드워드의 동성애는 도덕 질서뿐만 아니라 계급질서까지 전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말로는 〈에드워드 2세〉에서 일차적으로 에드워드 왕의 동성애, 그리고 기존의 계급질서를 무시하는 개인적 애정을 강조하여 절대적 왕권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왕의 "정치적 몸”보다는 "인간적 몸”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말로는 최대한 왕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켜, 계급절대주의의 신화를 벗기는 수단으로 삼은 셈이다. 더구나 치욕적인 모습으로 살해당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은 왕과 왕권에 대해 관객들이 품고 있던 신화를 완전히 해체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이처럼 에드워드의 인간적동성애에 초점을 맞추면 이 극은 치적이라기보다 사적 인간관계를 더 강조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진정한 왕권의 추락은 왕의 어리석고 타락한 행위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행태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로는 에드워드를 나약하고도 무능력한 왕으로 그림으로써 귀족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고 그들의 마음대로 휘둘리는 존재로 묘사했다. 셰익스피어가〈리처드 2세〉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칼라일 주교의 대사 등을 통해서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리처드 2세의 왕으로서의 고귀함과 권위를 최대한 부각시킨 반면, 말로는 에드워드의 권위를 최대한 추락시키고 그의 불행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역사에서 신의 섭리를 부인한다. 토마스 카텔리는 에드워드가 왕관을 모티머에게 빼앗긴 후, 그의 육체는 찬탈자의 권력이 마음대로 자행되고, 말로가 마음껏 해부하고 탈 신비화시키는 공간이라고 지적한다. 에드워드의 육체는 개비스톤이라는 천한 신분의 인물이 마음대로 즐겼던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그 신성함이 무너졌지만, 매트러비스나 거니, 라이트본과 같은 모티머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더욱 적나라하게 유린되기 때문이다.
제 5막에서 에드워드가 사로잡힌 뒤 받는 육체적, 정신적 고문은 결코 왕이 겪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것들이다. 모티머는 매트러비스와 거니에게 “그를 더욱 속 타게 만들고 욕을 하고”, 그가 울면 위로하지 말고 "악담으로 그를 더욱 슬프게 하라”고 명령하지만, 그들은 명령 이상으로 에드워드를 괴롭힌다. 그들은 더러운 시궁창 물로 에드워드의 턱수염을 밀어버리고,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유독가스가 올라오는 지하 감옥의 하수구 속에 에드워드를 세워놓았으며, 그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북을 쳐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부살인자인 라이트본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떠는 에드워드를 중세 도덕극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달콤한 말로 안심시킨 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동성애를 패러디하는 끔찍한 살해를 저지른다. 그런데 이처럼 영국의 왕이 왕을 죽이려 한 반역자나 겪을 법 한 고통을 겪는 동안, 말로는 왕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에드워드가 겪는 처절한 불안과 희망, 그리고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은 궁극적으로 귀족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계급질서 이데올로기가 지닌 허구성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왕을 거역하고 심지어 죽이는 귀족들의 행태는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서 왕을 이용하는 것뿐이지, 진심으로 계급질서를 신봉하여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모티머가 개비스톤을 불러들이자는 이사벨라의 계획에 동의하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왕을 변화시키고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겁니다.” 라고 주장하듯이, 그 들은 겉으로는 국가의 이익이나 왕의 안위를 내세우지만 속셈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권력욕을 채우는 것이다. 결국 왕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는 귀족들, 특히 에드워드를 무참히 살해하는 모티머의 행위는 이 절대왕국에서 나약한 왕의 존재는 결국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왕의 신격화는 곧 정치 계급질서 유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왕의 존재는 지배 상류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념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내세운 상징적 존재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내세운 왕이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거나 기존질서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언제든지 왕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세울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 바로 이 극이 보여주는 정치적 현실이다. 서머스의 지적처럼, 이 극의 정치현실에서 전통적 가치는 무의미하고 오직 힘과 폭력만이 궁극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2세의 몰락은 사회 계급질서의 와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홀린셰드의 《연대기》기록에 따르면 귀족들은 에드워드 왕의 무능력과 타락을 문제 삼고 도저히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왕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말로는 그 이유보다는 귀족들의 다른 목적, 즉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재현한다. 특히 귀족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에드워드 왕과 개비스톤 사이의 동성애의 부도덕성이 아니라, 개비스톤이 평민으로서 계급질서를 무시하고 귀족인 자신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군림한다는 사실이다. 홀린셰드의 《연대기》에서 묘사되는 개비스톤은 개스콘 (Gascon) 기사의 이들인 젠트리 계층이다. 하지만 말로는 작품에서 개비스톤의 신분을 비천한 태생으로 바꾸어버린다. 숙부 모티머와 조카 모티머는 개비스톤을 노예, 농사꾼 등으로 부르는데, 에드워드 왕 역시 이를 인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개비스톤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는 개비스톤이 죽은 후에 에드워드의 새로운 총애를 받는 스펜서 역시 천한 신분으로 바꾸어버린다. 홀린셰드에 따르면 스펜서는 분명 귀족계층이지만, 말로의 작품에서 그는 하인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말로가 이처럼 에드워드의 총애를 받은 인물들의 신분을 바꾼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귀족들이 에드워드의 동성애에 대한 비난보다는 오히려 개비스톤의 신분상승과 자신들의 계급질서가 위협받는 것에 대해 더욱 민감 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말로는 에드워드와 귀족들 의 갈등을 계급질서의 신화를 탈 신비화시키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개비스톤이나 스펜서의 신분상승은 귀족들 중심의 계급질서가 절대 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왕의 총애를 받으면 개비스톤과 같은 정치적이고 간교한 인물도 권력을 얻고 마음대로 권위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은 기존 정치 종교 질서가 지니는 신비주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왕권과 계급질서에 대한 탈신비화는 당대의 동성애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말로 당대에 동성애는 불법이었다. 심킨의 설명에 따르면, “1533년에 동성애를 포함한 변태적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으며 그 범죄에 대한 공식적 벌은 죽 음이었다”. 물론 이 법률은 동성애를 범한다고 신교세력에 의해 비난당하던 가톨릭 사제들을 주요 목표로 삼은 것이었지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성경적 사건들이 주는 경고와 교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대의 도덕질서에 따르면, 에드워드의 동성애는 "하늘의 왕을 거역하는 범죄이고 자연 질서에 대한 위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동성애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라이트본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항문을 관통시켜 에드워드를 살해하는 방식은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동성애 범죄에 대한 처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머스의 지적처럼 말로는 작품의 어느 곳에서도 동성애를 타락한 범죄이자 저주받은 행위라는 당대의 신화를 전달하지 않는다. 에드워드와 개비스톤의 관계를 비난하는 숙부 모티머마저도 에드워드의 동성애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숙부 모티머 : 강력한 왕들은 총애하는 시종들을 거느렸지. 알렉산더 대왕은 헤파이스티온을 사랑했고, 정복자 헤라클레스는 힐라스를 위해 눈물을 흘렸으며, 무서운 아킬레스도 파트로클루스를 위해 슬퍼했다.
말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기독교 도덕질서가 범죄로 규정한 동성애를 옹호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에드워드가 개비스톤, 스펜서 등과 맺는 동성애 관계는 바로 당대 도덕질서에 대한 도전이고, 이 작품을 "모든 독단적 도덕주의자들을 적으로 만드는 선동적이고 악마적”이라고 주장한 퍼비스 보예트(Purvis Boyette) 의 주장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개비스톤이나 스펜서 등에 대한 에드워드의 사랑은 아내인 이사벨라에 대한 사랑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고, 개비스톤과 스펜서 역시 에드워드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탐하기는 하지만 에드워드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죽는다고 말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은 동성애에 대한 당대의 부정적 사고에 대한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왕권과 계급질서, 그리고 동성애에 관한 도덕적 신화는 〈에드워드 2세>에서 말로가 초점을 맞춘 탈신비화의 주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말로의 탈신비화 전략이 극단적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의 전체적인 극 구조나 결말부분은 당대 지배담론과 질서를 지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지배담론과 질서를 충격적 방법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드워드 2세의 나약함과 동성애로 인한 도덕적 타락은 그의 불행과 죽음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결말 에 가서는 결단력과 용기를 지닌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사회의 안정과 질서가 회복되는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기존질서에 대한 궁극적 전복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동성애와 육체적 고통,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의 정도가극 단적이기 때문에 결말에 회복되는 질서와 안정은 그 효과가 크게 반감되고 만다. 더구나 모티머와 귀족들이 내세우는 국가의 안위와 질서, 그리고 계급질서의 신화가 결국은 자신들의 권력욕과 기득권 유지에 있다는 사실은 기존 신화의 절대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말로의 탈신비화 전략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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