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저자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작품이 쓰인 날짜도 분명치 않고, 극의 장르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말로가 이 극의 주요 저자라는 데 이견을 다는 비평가는 없지만, 초기 판본인 1594년 판본 표지에 토머스 내쉬의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같은 대학을 다닌 말로와 내쉬 두 사람이 학창 시절에 이 작품을 공동 작업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최근 평자들은 내쉬의 공헌도가 극히 적으며, 심지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말로의 처녀작이고, 대학시절에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의 세련된 극작법과 수 사적 언어를 근거로 이 작품이 후기 작품이거나 젊은 시절에 썼던 것을 개정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1585〜1586년경에 쓰인 말로의 초기작품이라는 전통적 시각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 작품의 장르에 관해서 는, 1594년에 최초로 인쇄된 판본의 표지에<카르타고 여왕 디도의 비극〉이라고 장르를 표기하고 있지만, 앤소니 트롤롭(Anthony Trollope) 같은 평자들은 이 작품을 해학극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런가 하면 엘리엇 (T. S. Eliot) 은 이 작품에서 진지하고도 냉소적인 유머를 발견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연구들이 말로를 냉소적 유머의 대가로 표현하면서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을 신랄한 위트의 표본으로 평 하였다.
이처럼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템벌레인 대왕>, 〈몰타의 유대인>, 〈파우스투스 박사〉, 〈에드워드 2세〉등 주요 작품들만큼 많은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많은 다양한 해석들이 있으며, 특히 주인공인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에 대한 말로의 묘사에 대해서도 상당히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극 중에서도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에 대한 중요한 비평은 크게 두 가지 대립된 관점으로 나뉜다. 첫 번째 관점은 희생제물이 된 여왕을 동정하고 아이네이아스를 냉정한 변절자로 비난하면서 극의 비극적 요소를 강조하는 낭만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말로의 작품이 출전인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의 내용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에 주목하면서, 아이네이아스와 신들을 깎아내리고 나아가서 신들의 말을 따르는 아이네이아스의 선택을 비난한다. 이러한 낭만적 시각과 대립되는 두 번째 관점은 극의 희극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선악에 대해 엄격한 도덕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출전의 내용과는 달리 디도의 비극적 위상을 깎아내리는 점들을 주로 부각시키며 그녀가 대변하는 낭만적 분위기를 평가 절하한다. 디도의 사랑을 주피터나 유모의 우스꽝스런 사랑과 연결시키는 것과 같은 반낭만적 분석이 이러한 시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말로의 주요 작품들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해석들이 존재하며, 이는 주로 작가가 주인공의 편에 서있는가, 아니면 냉정 하게 주인공을 판단하고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으로 대변된다.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에서 주인공의 비극적 면모를 강조하는 시각과 반대로 희극적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해석은 장르적 성격을 기초로 하는 전통적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극에서 이러한 장르적 성격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흔히 말로 적 영웅으로 불리는 주인공의 극단적 욕망추구의 양상이고, 또한 나아가서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과 도전정신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대립적 논쟁을 가능케 하는 배경은 바로 말로의 작품에 나타난 파격적 전복과 도전정신 때문이다. 디츠(Sara Munson Deats)는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이 성의 역할이나 정치적 책임과 같은 규범을 거꾸로 뒤집어놓는 카니발 적 세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권위 질서, 성질서, 정치질서 등이 도전받고 때로는 조롱당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시각차에서 다양한 대립적 논쟁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전복과 도전의 형태는 신들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난다. 말로는 이 작품에서 신들의 개입을 축소하려고 하지 않고, 주피터 신을 비롯하여 여러 장면에서 신들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삶을 개입하고 조종하는 신들을 결코 절대시하거나 숭배하지 않고, 오히려 신들을 평가절하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비너스 여신이 주피터 신에게 아이네이아스를 구해달라고 닦달하는 내용을 극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디도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 계략을 꾸미는 주노와 비너스 두 여신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주노가 어린 아스카니우스를 살해함으로써 트로이의 마지막 희망을 없애버리려는 복수심을 표현하는 장면을 재현하였으며, 주노의 복수를 예상하고 경계하던 비너스와 만나 두 여신이 말다툼을 벌이는가 하면, 속마음을 숨기고 화해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모든 장면들보다도 가장 신들을 우습게 보이도록 만드는 장면은 바로 극이 시작하자마자 등장하여 서로 희롱하는 주피터와 가니메데스의 모습이다.
주피터는 가니메데스와의 동성애에 빠져있으며, 자신의 강력한 힘과 권위를 자랑하지만, 가니메데스흫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깃털을 뽑는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거만한 운명을 조종하고, 시간의 실을” 자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든 허락하겠다고 맹세하는 무책임한 신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주피터의 모습은 디츠의 지적처럼 성 역할, 정치적 책임의 문제, 그리고 이성애라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주피터는 신들의 왕이며, 고전적 가부장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가니메데스에게 빠져 희롱하는 모습은 음탕하고, 동성애적이며, 정치적으로 무책임하다. 따라서 이처럼 가부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주피터를 전복시킴으로써, 이 극은 사랑을 여성적 속성으로 의무와 책임을 남성적 속성으로 여기는 전통적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통제하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사랑과 복수심에 빠져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신들이 주관하는 아이네이아스와 디도의 사랑과 이별은 결코 절대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아이네이아스와 디도는 신들의 장난감이자 희생물로 여겨진다. 앨린(John Cameron Allen)과 같은 비평가는 변덕스럽고 신중하지 못한 신들의 조언과 지시를 따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앨린의 시각에 따르면, 말로는 인간을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하고 이용하는 신들을 비하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신들에게 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이용당하는 인간도 보잘것없는 존재로 평가절하 한다. 하지만 말로가 묘사하는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의 모습은 그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특히 디도의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을 다바쳐 열정적 사랑을 추구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녀는 거만하고 독단적이지만, 사랑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할 수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신들의 희생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었다가 그 대상을 마음대로 빼앗아 가버리는 신들의 부당함을 죽음으로 항거하는 말로 적 영웅인 것이다.
따라서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의 관계 역시 전복된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이들의 관계에서는 특히 성 역할의 전복이 두드러진다. 말로는 아이네이아스를 영웅으로 삼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와는 달리, 디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극의 주인공을 로마를 건국한 트로이의 전사인 남성영웅에서 카르타고의 여왕인 여성영웅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주도권을 남성이 아닌 여성이 갖는다는 점도 기존의 성역할을 바꾸어 놓은 한 가지 요소가 된다. 그녀는 남성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줍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구애하여 자신의 연인으로 만드는 적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흔히 남성들이 자신의 애인에게 그렇게 하듯이, 아이네이아스의 아름다움과 용맹함을 찬미하고, 선물을 주면서 그를 자신의 연인으로 삼는다. 아이네이아스가 보여주는 애정 표현은 그녀의 불타는 욕망에 대한 단순한 반응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극에는 디도와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자신의 불타는 애정을 주도적으로 전달하고,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바로 디도의 여동생 안나(Anna)이며, 그녀 역시 이아르바스(Iarbas)를 짝사랑하여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데, 이들의 관계에서도 여성이 욕망하는 주체이고 남성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권위 질서와 성질서의 전복은 말로가 이 작품의 출전으로 삼고 있는<아이네이스>를 쓴 베르길리우스와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극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에서 많은 평자들의 관심을 받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이네이아스가 디도를 버린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신화를 신화 속의 영웅과 결부시키려는 구상에서 서사시를 썼기 때문에, 아이네이아스를 로마를 건국하라는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훌륭한 인물이자 올바른 판단을 하는 영웅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말로는 베르길리우스와 달리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방적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작품의 제목을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으로 정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로는 아이네이아스보다는 여성인 디도의 강렬한 사랑과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아이네이아스의 영웅적 면모보다는 신들의 개입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불꽃같은 열정을 쏟아내다가,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는 디도의 비극적 운명을 더 주목하는 것이다.
여성의 변덕스러움을 말하며 아이네이아스의 영웅성을 강조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작품과는 달리, 말로는 여성인 디도에게 비판이나 비난을 가할 수 없는 상황을 강조한다. 그 중요한 배경은 바로 그녀의 사랑에 개입한 신들 때문이다. 극 속에서 디도는 자발적으로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비너스와 주노의 계획에 따라 큐피드의 화살에 찔려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갖은 고생 끝에 카르타고의 해변에 당도한 아이네이아스를 처음 만났을 때, 디도는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트로이의 멸망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는 그녀의 사랑이 그렇게 시작된 것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비너스와 주노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로가 이러한 신들의 개입장면을 굳이 만들어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사랑에 대한 책임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흔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디도의 경우처럼 신들의 농간에 의해 사랑에 빠진다면,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책임이 없다.
따라서 비극적인 사랑의 일차적 책임은 신들에게 있지만, 말로가 디도보다는 아이네이아스를 비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아이네이아스가 보여주는 변심의 과정 때문이다. 그는 디도의 사랑이 큐피드의 화살 때문인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녀의 사랑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맹세한다. 사냥을 나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동굴에 들어가 디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 한다. 자신을 여신으로까지 칭하면서 백성들을 지배하는 그녀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너무 독단적이고 거만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우리는 그녀가 남성을 능가하는 강력한 힘과 기백으로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는 특별한 여성임을 인지할 수 있다. 더구나 그녀는 여왕으로서 부러운 것 하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의 사랑을 잃게 되자 목숨을 던질 수 있는 강한 여성이기도 한 것이다. 말로는 결코 디도를 큰일을 하려는 남성의 결심을 흐리는 연약한 여성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대립적 접근이 가능한 복합적 텍스트이다. 여러 비평가들의 지적처럼, 주인공 디도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비극적 혹은 희극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말로의 전형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존 권위와 질서에 대한 극단적 도전과 욕망추구의 형태로 이 작품을 분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 비평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성과 인종(race)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다. 성 역할의 전복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여성이나 성문제에 대한 말로의 시각을 좀 더 깊게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인종문제 역시 이 작품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주제가 될 수 있다. 트로이라는 먼 이국땅에서 온 남성을 아프리카 여성이 사랑하다가, 결국 버림받고 자살하는 내용은 비록 신화에 근거하고 있지만 얼마든지 인종적 접근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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