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clint 2015. 11. 7. 08:58

 

 

 

 

 

이 작품의 제작연대는 1595年으로 학자 간에 합의를 보고 있다. 1623年에 제 1,2 본이 나오기 전, 1597年에서 1615年 사이에 4折本으로 이미 다섯 번 판을 거듭했으며, 2본의 내용은 약간 부분적으로 첨가하여 인쇄된 것 같다.
作品의 바탕은 셰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사극과 마찬가지로 홀린세드의 『연대기』에서 따온 것이지만, 劇作家로서의 셰익스피어는 『연대기』의 줄거리가 인물을 여러 모로 劇化시켜, 그의 목적에 알맞도록 한 것은 물론이다. 언어에 있어서도 『연대기』의 말을 많이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마치 작가 자신이 만들어 낸 이야기처럼 자유로이 말을 구사하고 있음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첫째로 주인공인 리처드 왕도 『연대기』에 있어서 보다도 그의 결점에 불구하고, 作品에 있어서는 훨씬 더 공조감을 가질 수 있는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고온트도 전자에는 이기적이고 괄괄한 성품이며, 죽을 때엔 나이 쉰아홉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劇에는 훨씬 더 늙고, 임종 때에도 英國의 장래만을 염려하고 죽는 애국적인 인물로 묘사돼있다. 王과 임종에 처한 고온트 사이의 불편한 관계는 역사책에도 없는 장면이지만, 작가가 교묘하게 꾸며 넣은 것도 틀림없는 것 같다. 이밖에 3막 끝의 정원사의 정치적 견해를 말하는 장면도 전혀 작가적 구상으로 짜 넣은 것이며, 이런 것들은 다 이 극의 줄거리를 전개시켜 나가는 데 있어,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또한 그 劇的 효과를 더욱 자아내고 있느니만큼, 셰익스피어의 극작기교의 일면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리처드 2세의 성격은 그 전기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다루기 곤란한 인물로 생각되어 왔다. 인품으로는 잘생기고 매력 있는 왕이었으며, 성격상이로도 좋은 편이었으나, 일면 짓궂고 고르지 못한 양면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에 왕위에 앉아 있다가, 보통사람 같으면 왕위를 쥐고 나가기 위해 온갖 수간을 다할 것을, 오히려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그것을 다른 자에게 넘겨 줄 것인가에 더욱 마음을 기울이는 등으로 봐선, 여러 가지로 모순된 점이 많은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측근에 대해서는 그는 아름다운 장미와 같다는 평판이나, 그의 정적에 대해서는, 인격도 남자다운 점도 없는 보잘것없는 무능한 왕으로 비난을 받은 것 같다.

 

 

 

1377年에 그의 조부 에드워드 3세의 서거로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1살의 어린나이였다. 따라서 그 후 약 20年 간은 국사에 있어서 그의 숙부들의 후견을 많이 받았다. 이들 중의 두 랑카스터 공작, (고온트와 요크 공작) 에드먼드는 극중 인물로 나타나지만, 그로스터 공작은 이미 암살당해 극의 첫머리의 블링브루크와 모브레이 간의 싸움의 발단이 된다.
1383年에 고온트가 카스틸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영국에서 가장 세력이 큰 귀족이었으나, 그가 떠난 다음 그의 막내 동생 그로스터가 강한 당파를 구성하고, 리처드 왕이 폐위당하기 얼마 전까지 젊은 왕의 모든 일에 反對했었다. 그러다가 1387年에는, 王은 늙은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은 몇몇 사람의 측근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로스터를 위시한 볼링브루크, 모브레이 등의 반대파는 왕이 그 측근들을 물리칠 것을 요구하고, 불응할 땐 퇴위시키겠다고 위협하며, 1년간 정사를 정리하기 위해 그로스터를 중심으로 한 섭정직 설정을 요구해, 그것을 관철했다. 이들은 반대파인 왕의 측근들을 없애 버리고, 왕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1389年에 왕이 23세가 되어, 섭정의 불필요를 선언하고 섭정을 물리쳤으며, 그로부터 수년 동안은 국사를 성공적으로 잘 다스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휴전협정을 맺은 것이 국민들 간에 불만을 자아내고, 또 왕은 은연중에 그의 세력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극중 인물로 나오는 부쉬, 그린, 배거트 등의 도움으로 의회를 좌지우지하고, 또 10년의 장구한 세월을 기다린 후, 1397年에 가서는, 그의 적대자에 대해 복수를 감행하였다. 따라서 그로스터는 사로잡혀 당시 모브레이가 총독으로 있었던 칼레에 구금되었다가, 거의 틀림없이 왕의 명령으로 그 곳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숙부 그로스터의 영향을 받았던 블링브루크는 모브레이를 그 공모자로 고발하고, 양자는 윈저로 가서 왕 앞에서 일을 결정하게끔 되었는데, 블링브루크의 고발은 그로스터의 암살사건에 있어, 왕 자신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극의 첫 장면은 리처드가 한창 승리의 절정에 있을 때이며, 왕과 귀족들 사이의 오래된 암투의 끝장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극적인 구성을 위해 이 암투를 두 사람의 결투, 하나는 절대적인 왕, 또 하나는 귀족을 대표하는 이 양자 간의 대결로 나타내고 있는데, 양자 간의 인물 대조 등, 극중에서도 가장 잘된 장면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 극은 비극적인 인물 묘사에 주안을 둔 작품이다. 그 이 비극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왕의 멸망, 부당하고 이기적이고, 무능력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왕의 패망을 그린 것이다. 어느 점으로 봐서는 리처드 2세는 셰익스피어의 王들 가운데서도 가장 동정이 가는 王이며, 또한 그의 후기의 위대한 비극적 인물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심울한 성격과 소극적인 망상에 잠기는 습성은 햄릿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리처드는 교묘하게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자신 극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불행에 처해서는 그 자신의 가련한 신세에 스스로 감동해, 자신의 비극적인 광경을 오히려 즐기고, 자신 시적, 비극 배우적인 주인공이 되어 그 감상적인 상상을 일으켜 그에 도취되는 것이다. 관객들이 애절한 동정심을 아끼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그의 성격은 볼링브루크의 계략적인 현실주의자이며, 조심스럽고 인내심이 강하며, 냉혹하고 상상력이 적은 성격과는 아주 뚜렷한 대조가 된다. 이 대조를 나타내는 데 있어, 셰익스피어가 그려내는 바는, 이 양자의 윤리적인 문제보다도 역사적 사실의 범위 내에서 양자의 행동 상으로 나타나는 성격을 묘사해 낸 것이다. 대조적인 면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다. - 고온트 父子, 리처드와 고온트의 병상의 장면, 요크와 볼링브루크 등등...
리처드는 왕으로서 행동의 인물이라기보다는 공상적인 시인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헤쳐 나가야 할 현실에 있어서의 의사라기보다는, 구름 속의 공상가이고, 인생을 위로해 줄 만한 현실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배우와 같고, 자기 자신의 能力으로써가 아니고, 하늘의 사령으로써 나라를 통치해 나가려는, 역사상으로는 드물지 않은 왕의 일예인 것이다.

 

 

 

 

역사.
리처드 2세 : 1367. 1. 6 프랑스 보르도~ 1400. 2 잉글랜드 요크셔 폰티프랙트.
잉글랜드의 왕(1377~99재위).
강력한 반대파 귀족계급과 싸워 패배·사망했으며, 이때문에 이후 85년간 잉글랜드의 왕권은 약해지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흑세자(黑世子)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손자로 1377년 6월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숙부였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비롯해 에드워드 3세 재위 말년에 권력을 잡은 귀족들이 계속 나라를 다스렸다.
곤트의 실정(失政)은 흑사병과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일어난 경제난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그 결과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리처드는 최초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는 고문관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는 한 듯하지만 대단히 침착하게 거짓 약속을 제시하여 반란세력을 무마시켰다(1381. 6. 14~15). 1382년 보헤미아의 앤 공주(1394 죽음)와 결혼했으며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1385년에 이르러 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같은 대수롭지 않은 정신(廷臣)들로 개인적 추종세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철런,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비첨 등이 이끄는 반대세력들도 등장했다.
곤트는 줄곧 파벌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다가 1386년 7월 카스티야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리처드를 적들의 수중에 내버려두었다. 리처드의 적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리처드의 비서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을 탄핵하고(1386) 11인위원회를 만들어 1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리처드가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왕권을 침해하는 반역적인 위법행위라고 선언하자 그의 적들은 이에 맞서 1388년 의회를 열어 리처드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범법자로 몰았고, 일부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린 국왕은 청원파(appellants)라고 불리는 5명의 반대파 주요 지도자들에게 굴복했지만 1389년 5월에 이르러 성년이 된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1389년말 곤트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상황을 진정시킴에 따라 리처드는 이후 8년간 곤트 및 청원파들과 외견상 화목한 관계로 지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국왕은 줄곧 이전의 적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다시 더욱 강력한 국왕 지지파를 결속해나갔으며 1397년 무렵에는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애런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시켰으며 워릭을 추방하고 글로스터를 투옥·살해했다.
청원파였던 곤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과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398년 9월 분쟁을 일으키자 국왕은 이 기회를 틈타 두 사람을 모두 추방했다. 뒤이어 1399년 2월 곤트가 죽자 리처드는 볼링브룩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해 5월 그는 아일랜드로 떠났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그가 없는 동안 볼링브룩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귀족들을 규합했고, 리처드는 8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볼링브룩에게 항복했다. 그는 9월 30일 폐위되고 볼링브룩이 국왕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는 10월에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4개월 뒤 그곳에서 죽었는데 아마도 스스로 굶어 죽은 듯하다.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2세 Richard Ⅱ〉에서 그가 살해당했다고 이야기한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리처드는 예민한 문학적 감식안을 지녀 제프리 초서, 존 가워, 장 프루아사르 같은 문인들을 후원했다. A. B. 스틸이 쓴 전기 〈리처드 2세 Richard Ⅱ〉가 1941년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