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우 작품들의 연대기는 매우 불확실하여 주요 작품의 집필 시기에 대해 학자들 간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몰타의 유대인」은 1589년이나 1590년, 공공극장에서 상연되었던 말로우의 첫 번째 작품 「탬벌레인 대왕」이 쓰인 바로 직후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반의 당시 관객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특히 1594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주치의였던 유대인 로페즈가 사형당한 사건 때문에 그 인기가 더욱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몰타의 유대인」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벤 존슨의 「볼포네」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밖에도 당대의 수많은 다른 작품들에서 그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그리고 유일한 초기 판본인 1633년 4절본의 표지를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이 바로 그 시기에 투계 극장이나 불사조극장에서 공연했던 헨리에타 여왕극단의 수중에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몰타의 유대인」에 대한 현대 비평은 많은 학자들이 1633년의 4절본에 대해 말로우가 최초로 쓴 작품이 아니지 않느냐는 의심을 품으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언어적 혹은 전기적인 분명한 증거가 있다기보다는 주로 작품에 대한 비평적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후반부 3, 4, 5막은 전반부 1, 2막에 비해 현저하게 열등한데 이는 작품이 출판 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수정을 가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철저한 본문 연구분석을 소개한 본 번역문의 원문 편집자 보컷(N. W. Bawcutt)은 이 작품이 초기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후기 작가가 수정한 혼적이 없는 말로우 자신의 것임을 분명하게 확인해주고 있다.
「몰타의 유대인」은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유대인 바라바스가 주인공이고 작품에 대한 해석은 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비평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구경꾼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색칠한 커다란 코를 붙인 단순한 괴물 같은 존재”냐 아니면 "부당함과 박해 때문에 비뚤어진 인간"이냐를 놓고 논쟁이 이루어졌다. 그 후 19세기에는 바라바스가 「탬벌레인대왕」과 「파우스트박사」에서 말로우가 그리려 했다고 보이는 야심에 찬 르네상스 인의 한 유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그는 말로우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과 관련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부 비평가들은 작품에 나타난 종교적 암시가 바라바스의 악행을 분명하게 응징하는 거라 주장하는 반면, 다른 비평가들은 말로우가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풍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작품의 표면에 드러나는 유대인 바라바스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악인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 죄도 없는 마티아스와 로도윅을 서로 증오하게 만들어 죽이고, 자신의 딸마저도 수녀들과 함께 독살하는가 하면 자코모와 베르나딘 수사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고, 자신을 배신한 이타모어와 창녀 벨라미라, 필리아보르자 등을 독살하는 등 배신과 음모를 끊임없이 자행하는 바라바스의 행위는 저주받아 마땅한 악당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라바스의 악행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라바스는 어떤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이 아니라 기독교도들의 통치를 받으며 평화롭게 장사하기를 원하는 상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이다. 작품은 그가 평화롭게 돈을 벌 수 없게 된 사건에서 출발한다. 몰타의 기사들은 정기적으로 터키에 바쳐야 할 공물을 무시했고, 그 결과로 닥친 정치적, 재정적 위기를 바라바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역사주의 학자 그린블랏(Stephen Greenblatt)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라바스는 말로우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 즉 템벌레인과 파우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권위에 순종하기보다는,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인물이다. 탬벌레인이 계급질서에 대적하고, 파우스투스가 신에게 대적한다면, 바라바스는 기독교의 권위에 대적하는 인물이다. 바라바스는 기존 권위에 대한 말로우의 전복 전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당대 기독교 관객들이 증오하고 두려워하던 악당의 전형, 유대인이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당대 영국 사회에서 신의 섭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권모술수와 속임수를 신봉하는 사악한 인물로 여겨졌던 마키아벨리의 소개로 등장하는 바라바스는 이미 그 성품과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악행에 의해 파멸하는 전통적인 악당의 모습을 그리면서 말로우는 바라바스가 그 사회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라바스는 단순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 상선들을 세계 곳곳으로 보내 물건들을 사고파는 거상이다. 그리고 돈과 재산을 추구하는 그의 행위는 유대인이자 수전노만의 특징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극중 모든 인물들이 추구하는 바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터키인들은 기독교도들에게 공물을 강요하고, 기독교도들은 유대인으로부터 돈을 빼앗고, 수도원의 수사들은 부자 개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 싸우고, 창녀와 소매치기도 돈을 얻기 위해 안달이다. 따라서 돈을 향한 바라바스의 탐욕은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풍자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이나 믿음, 명예와 같은 다른 가치들도 표현되지만 언제든지 금전의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는 나약한 것들이고 이 작품 속의 사회는 오로지 돈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힘에만 매달린다.
극의 초반부에 바라바스는 자신에게만 해가 없으면 몰타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는 전적으로 이기적인 인물로 드러난다. 그는 심지어 동족인 다른 유대인들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며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이익을 챙길 때는 편리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이 점이 바로 그가 다양한 형태의 속임수와 음모에 의존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대군에 맞서 싸우는 게릴라처럼 그는 적의 약점과 허점을 간파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가 적을 대적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적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다. 로도윅과 마티아스, 자코모와 베르나딘 수사의 경우가 그러하고. 크게는 기독교도와 터키군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이용하는 것 또한 거기에 해당한다. 바라바스가 적을 대적하는 또 다른 방법은 감정과 태도를 꾸며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다. 제 4막의 프랑스 악사 역할과 제5막의 죽은 시체의 역할은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극 전반에 걸쳐 그가 보여 주는 꾸밈과 가장이 그의 생존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 바라바스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은 부유한 상인의 역할이다. 하지만 위기상황이 닥치면 자신의 역할을 빨리 바꿔야 한다는 것을 바라바스는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는 너무나 빨리 태도를 바꿔 어떤 상황에서는 그가 하는 말의 진의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예를 들어 그가 이타모어에게 나열하는 악행기록들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이타모어에게 바라는 행위를 알려주기 위해 꾸며댄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라바스뿐만 아니라 기독교도들도 상황이 바뀌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친구인 로도윅과 마티아스는 사랑 때문에 서로 증오하게 되고, 자코모와 베르나딘은 재물을 얻을 욕심에 싸우게 되며, 위선적인 페르네즈는 상황에 따라 비굴해지기도 하고 허풍을 떨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어떤 의미에서 바라바스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기독교도나 터키인까지 포함하여 인간본성의 나약함과 변덕스러움을 대변하는 인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라바스에 대한 박해는 극중에서 어떠한 종교적 정당성도 갖지 못한다. 페르네즈와 몰타의 기사들은 과거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범했던 죄의 대가를 언급하면서 바라바스에 대한 경멸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돈을 뺏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더구나 그들은 터키에 바칠 공물로 압수한 돈을 터키에 대적하기로 마음을 바꾼 후에도 돌려주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사용해버린다. 이런 기사들의 태도는 "유대인을 파멸시키는 건 자선을 베푸는 거지. 죄가 아니야‘ (제4막 제4장)라고 말하는 이타모어의 입을 통해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종교적으로 바라바스룰 경멸하고 핍박하는 몰타의 기사들 자신도 기독교도의 적들을 공격하는 데 헌신하겠다는 종교적인 맹세를 했음에도 터키에 공물을 바치면서 자신들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기사들의 태도를 비난하는 마틴 델 보스코 또한 상업적 목적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인물이다. 그가 몰타에 온 건 자신이 생포한 터키의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 극에 등장하는 노예시장은 인간이 가축처럼 사고파는 대상으로 다뤄지는 가장 비인간적인 사회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은 로도윅이 아비게일을 원할 때, 그녀에게 직접 구애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바스를 통해 마치 다이아몬드를 사듯이 "가격은 얼마인가” (제2막 제3장)라고 물으며 거래하려고 드는 데서도 분명하게 암시되고 있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주의가 판치는 사회 속에서 전통적인 도덕은 설 자리가 없다. 바라바스와 이타모어, 수사들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수도원, 수녀원 같은 종교기관의 모습은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경건한 가면 뒤에서 음란과 탐욕을 일삼고 있다. 보컷은 「몰타의 유대인」에서 방백, 말장난, 동음이의어, 종교적 비유, 격언 등이 말로우의 다른 작품들보다도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 일관적인 언어적 장치들이 몰타 사회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 극에서 미묘하고 모호한 언어적 표현들은 자아 성찰과 자기 발견이 아니라 아이로니컬한 부조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아비게일이 죽으면서 "제가 기독교도로 죽는 것을 지켜봐주세요”(제3막 제6장)라고 했을 때. 베르나딘의 반응은 "그래, 그것도 순결한 처녀로.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군”이었다. 그의 잔인한 대답은 아비게일의 죽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녀가 순결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결론적으로 「몰타의 유대인」은 매우 염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3막 제3장에서 아비게일이 "지상에 사랑이라곤 없다"고 탄식하듯이, 이 극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온통 위선과 속임수로 가득 차있다. 「몰타의 유대인」은 흔히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기쁨과 편안함을 주는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블랙 코미디처럼 조롱과 경멸에 가까운 웃음이다. 그리고 이 웃음은 작품의 심각함으로부터 우리를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함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우리의 태도가 갖는 불합리성을 꼬집고, 정상적인 인간의 행동을 패러디하는 현대극을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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