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메르솔롬』은 1886년에 쓰여진 입센의 말년 작이다. 이 작품들은 입센의 전성기(중기) 이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회문제극 시기에 나온 네 작품과는 색깔이 상당히 다르다. 네 작품은 『사회의 지주』(1887) 『인형의 집』(1879) 『유령』(1881) 『민중의 적』(1882)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들은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한 리얼리즘 극이다. 그런데 입센은 말년으로 가면서 인간 내면의 갈등에 집중하고 기법 적으로도 상징주의에 기울었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작품이 『들오리』(1884)이다.
‘로즈메르솔롬'(Rosmersholm)의 ‘솔롬sholm’은 저택을 뜻하는 장이나 가문인듯 하니, 『로즈메르솔롬』은 ‘로즈메리 장’ 내지 ‘로즈메리 가문’쯤 된다. 작품의 주인공은 요한 로즈메르로, 로즈메르솔롬의 주인인 그는 한때 보수주의에 동조하는 목사였으나, 지금은 정치 운동과 목사직에서 손을 떼고 은거하고 있는 상태다. 그가 공적 생활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것은, 아내의 자살 때문이다. 비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데 대한 절망감과, 남편 옆에 붙어 있는 젊은 처녀 레베카에 대한 질투로 장원 앞에 있는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비타가 살아 있을 때,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자신들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포장했으나, 그것은 아내는 물론이고 두 사람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다. 비타가 죽고 나서도, 두 사람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기만을 계속하는데, 이는 죽은 비타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다.
공적 생활에서 손을 뗀 로즈메르에게 손위 처남이자 보수주의자인 크롤이 찾아와, 사회진보당(사회주의자) 세력을 누르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사회진보당 진영에서도 간절히 그의 지지를 요청한다. 로즈메르는 각기 찾아온 처남과 사회진보당을 지지하는 신문의 발행인인 모르텐스가드와 대화를 하는 중에, 자신이 목사직만이 아니라 신앙마저 버렸다는 것을 고백(선언)하게 된다.
보수주의자인 크롤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여기에 굳이 적을 필요가 있을까? 그것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진보당의 대표 격으로 로즈메르를 만나러 왔던 모르텐스가드의 반응이다. 애초에 그가 로즈메르를 찾아와 지지를 구하게 된 속내는 “독실한 기독교도를 얻게 되면 언제든지 저희의 도덕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고 동조자를 포섭할 기회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즈메르가 선뜻 사회진보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나서면서 “난 이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외다. 기독교니 원리니 하는 것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되었어요. 그건 나와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곧바로 태도가 바뀐다.
모르텐스가드 : […] 만약 목사님께서 교회와 손을 끊으신 걸 발설을 하시게 되면 애초부터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마십니다.
로즈메르 :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모르텐스가드 : 예, 절 믿으십시오. 여하튼 그렇게 되시면 이 지역에선 대의명분을 위해 그다지 많은 일을 하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미 저희 쪽에서도 목사님과 같은 사상을 지니신 분들을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저의가 요구하는 건 기독교 사상입니다. … 이를테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존경하는 기독교 원리라 할까요. 저희 쪽에서 보면 그건 필요악이죠. 그러니 대중의 관심을 저버리는 발설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로즈메르 : 알겠습니다. 내 변절을 누설하기라도 하면 나와는 관계를 끊을 셈인가 보군요.
모르텐스가드 : (머리를 저며) 그런 모험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그들을 공적으로 삼은 보수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양편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타가 떨어져 죽은 다리에서 자살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후미진 해안마을의 관습과 전통 탓이 아니다. 자신들의 사랑을 떳떳이 선언하지 못했던 기만과, 서둘러 삶을 기피하고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는 오도된 세계관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이 오도된 세계관은 영웅의 표지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관습과 전통을 가리키는 ‘백모단(비합법적인 자경단)’, ‘이상한 법’, ‘유령’, ‘원죄’, ‘벽에 걸린 초상화’ 등의 모티브와 상징이 가득하다. 특히 노르웨이 서부 해변 도시의 오랜 명문가인 로즈메르 가의 장원은, 자유로운 인간의 생기를 빼앗아 가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 ‘오래된 저택’은 항상 ‘죽음의 집’을 뜻한다.
『대 건축사 솔네즈』에서, 입센은 『로즈메르솔롬』의 주제를 되풀이한다. 한때는 높은 첨탑(교회)을 설계하는 건축사로 이름을 떨친 솔네즈는 장인 집의 화재가 원인이 되어 두 아이가 죽음을 당하자, 신앙을 잃고 더 이상 교회를 짓지 않는다. 대신 평온하고 안락한 ‘지상의 집(일반 주택)’만 지었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창조력이 고갈되고 젊은 건축가들이 도전해 오자, 최후의 첨탑을 짓게 되고 ‘공중’에 자신의 거처를 만들고자 한다.
『로즈메르솔롬』이 전통과 관습을 자살이라는 극한 선택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영웅들의 이야기라면, 마지막으로 건설한 첨탑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는 솔네즈 역시, 자신의 자유 의지로서 노쇠와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에 도전하고자 했던 일종의 프로테메우스적 영웅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유럽 연극계와 당대 유럽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회문제극 시기를 거쳐 입센이 도달했던 종착점에는, 오직 ‘자유’라고 쓰인 깃발만이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
사랑과 죽음의 문제
헨릭 입센의 「로즈메르솔롬」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주제 중 가장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 하나가 남녀관계에서 빚어지는 사랑의 문제라면, 다른 하나는 소위 잃어버린 세대들이 남기고 간 절망감과 허무감과 불안감과 공포감을 도약대로 한 죽음의 문제라 할 것이다. 이 두 개의 문제는 입센의 초기 낭만주의와 후기 상징주의fil 빠짐없이 대두되는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같은 사랑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해도 입센의 초기 낭만주의 작품들은 여주인공들이 대개의 경우 문명사회와는 동떨어진. 이를테면 원시적 모럴을 가지고 있고 후기 상징주의 작품들의 여주인공들은 그와는 반대로 개개의 특유의 심리적 모럴이나 지성적인 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초기에서부터 말기로 이어지는 이러한 사랑의 문제들이 정상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왜곡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남녀 두 주인공 중 어느 한 사람은 심한 절망감에 휩싸인다거나 죽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문제는 항시 죽음의 문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인데, 레베카에 있어서와 같이 무조건적인 사랑, 또는 카타리나(입센의 처녀작「카타리나」의 주인 공)와 아그네스(「브란드」의 여주인공)에 있어서와 같이 무분별한 성관계 등등이 그것이다. 남녀의 애정이나 교우관계는 입센의 작품에 있어 호기심을 끄는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관계의 상징의 역할이기도하다. 사랑의 문제만 하더라도 입센은「로즈메르솔롬」에서 단순히 남녀 간의 애정관계나 성관계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인류가 지금까지 지녀온 개념 속에서 그 극한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기독교적 범애정신을 그 지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그의 초기의 낭만주의와 중기의 사실주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후기 상징주의 작품에서는 이런 면이 공통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입센이 상징주의 연극에서 다루는 여성, 특히 「로즈메르솔롬」의 여주인공인 레베카 웨스트라는 여인상은 진정한 남녀 사이에서 오고 가는 소위 '주고-받기'의 자아를 완전히 잃은 오로지 복종과 헌신만이 있는 애정관계의 여성이고 오로지 '주는 면' 하나만이 있는 여성이다. 레베카 웨스트가 로즈메르에게 퍼붓는 애정은 종전의 페리권트에 대한 솔베이그의 애정, 헬메르에 대한 노라의 애정, 솔네즈에 대한 알랜의 애정과는 전혀 다르다. 이 희곡의 1막 몇 페이지와 4막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어보면 누구나 다 쉽게 레베카의 애절한 사랑에 싸인 로즈메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긴 세월의 불안과 악운에 시달린 로즈메르는 레베카의 정신적 원조를 받게 된다. 기진맥진한 로즈메르에게 레베카는 확신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고귀한 인물임을 인식시켜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용기와 꿈을 심어 준다.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로즈메르의 태도 또한 인간의 참된 기독교적인 사랑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다.
극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레베카는 로즈메르의 전처인 비타(크롤 학교장의 여동생)의 죽음을 레베카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로즈메르로 하여 자유인으로서의 꿈을 저버리지 않기를 빌며 함께 죽음으로써 두 사람의 결백을 입증코자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면은 애절 그대로의 광경이다. 과거의 삶에 허우적거리는 로즈메르를 달래며 이번에는 행복하고 위대한 삶을 꿈꾸길 빌며 비타가 갔던 길을 가려는 레베카의 절규는 참으로 애절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 절규가 끝난 후 소파 위에 엎드려 있는 로즈메르릐 그 가련한 모습을 보고 레베카는 그에게 다시금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데. 이것을 묘사한 4막 중반부의 글에 'innocence(결백)' 라는 말이 군데군데 나온다. 이것은 소위 죽음으로 인한 신생추구라는 입센의 상징주의 수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그 'innocence' 에 간직된 레베카의 로즈메르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통렬한 것이다. 다음, 「로즈메르솔롬」에 나타난 죽음의 문제 두 남녀 주인공의 동반 자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또한 다양하다. 죽음의 문제가 작품의 상징성과 연루되어 있고 기존의 상징주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리적인 악과 폭력으로 인한 죽음은 이 작품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계기로 인간의 지금까지의 모든 삶과 결별하여 보다 나은 삶인 신생을 찾는다는 주제의식은 입센이 줄기차게 추구한 중심 주제라는 것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 입센은 모든 형태의 죽음에 대하여 강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으로 죽음이 그의 작품에서 연출하는 의의 내지 역할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의 종류야 어떻든 간에 그가 극 속에 죽음을 도입하는 이유는 삶을 거점으로 하여 보다나은 삶을 포착하려 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연극은 삶을 전제로 한 관점에 서서 생활조건을 위주로 한 측에선 예술이었다. 그러나 입센의 「로즈메르솔롬」에서의 죽음의 문제는 그런 물리적이고 소박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아득한 옛날부터 삶이 있는 인간이 예외 없이 직면하는 죽음의 문제, 그 죽음을 계기로 하여 삶을 포착하는 방법을 새로이 제시하였다는 점, 즉 과거의 연극이 불문에 붙였던 대전제에 대결하는 연극을 남겼다는 점에 있다.
제1막과 2막에서 주로 다루는 소재는 로즈메르 개인의 내부적 갈등이다. 3막의 첫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빚어진 갈등의 원인과 결과를 아이러니컬하게 파헤친다. 즉 여기서 로즈메르는 자신의 무죄를 확증할 길이 없음을 알고 자유인으로서 삶을 살아 갈 희망을 상실하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로즈메르는 확실히 그의 전통주의 사고 관을 끊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망상에 계속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입센은 갑자기 자신의 주의력을 레베카에게로 전환시키므로써, 그녀를 중심인물로 삼으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레베카는 매사의 일을 참으로 완벽하게 처리하려 한다. 그래서인지 로즈메르는 부수적인 인물로 밀려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여기서 입센은 큰 모험을 감행하는 듯하다. 3막의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대사는 2막의 그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로즈메르의 마음을 돌리려는 레베카의 장황한 설교와 로즈메르의 죄의식으로 인한 과거에 대한 후회뿐이다. 즉 여기서는 입센이 아직껏 구축해온 구성 제일주의나 잘 짜여진 연극 (well-made play)으로서의 효과는 외관상 찾아볼 길이 없고 과연 그가 극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정말이지 우리는 그에 대한 의구심마저 느끼게 된다. 로즈메르와 레베카 사이의 애정관계는 헬메르와 노라의 그것과는 달리 사회이탈이라는 토대 위에 서있는 게 아니라. 사회와 정면으로 맞서 그것과 싸운다는 투쟁이라는 토대 위에 서있는 까닭으로 다른 한편으론 서로가 심리적 만족감을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강화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말하자면. 여기서의 로즈메르와 레베카와의 관계는 헬메르와 노라와의 관계보다 발전된 모습이며 레베카는 여성으로서 강인한 신념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노라보다 높은 차원에 있다. 과거를 잃어 정신적인 부상을 입은 노라나 헤다가블러처럼 그녀도 비타의 간접살인과 사생아로서 태어난 과거 때문에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는 여성이다. 그러나 이 상처는 로즈메르에게 퍼붓는 사랑으로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만이 로즈메르솔롬의 황량한 낯선 산간에서 북쪽 고향에 대한 향수를 풍길 수 있다. 아미바 적인 존재인 레베카에 대하여 작자는 조금도 적의는 없고 오히려 비로소 이 작자는 그의 최초의 전적으로 긍정적인 여주인공을 3막에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레베카와 로즈메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사와는 달리 3막에는 크롤과 레베카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사를 작자는 완벽하게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사는 2막에서의 극적 행동과 표리일치로 융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즈메르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미 알고 행동하지만 레베카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음을 안다. 그에게 과거에서 벗어나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그녀이지만 그녀 자신 또한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불합리한 것에 얽매여 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레베카는 자신의 나이에 대해 걱정하며 자신이 사생아로 알려지길 원치 않을 정도의 전통적 모럴을 소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막의 조화는 주제를 강조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 입센이 이러한 조화의 과정을 심도 있게 마련하는 기점은 크롤이 로즈메르를 충고할 때 나타나는 이른바 원리원칙에서부터 편의주의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크롤은 로즈메르와 레베카와의 관계가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3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인상적으로 비교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즉 로즈메르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남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의 길을 걸어가려 하지만, 레베카는 로즈메르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포기한다. 로즈메르는 후퇴하지만 레베카는 앞으로 전진 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녀의 행동은 그녀가 자유주의를 언제까지나 수호하려는 로즈메르를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용기와 헌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극적 아이러니는 비단 3막 뿐 아니라 전 희곡을 지배하게 된다. 「로즈메르솔롬」에서 입센은 기묘한 아이러니를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의 아이러니는 단순히 어떤 극적 긴장감이나 충동을 자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말하자면 숨어있는 어떤 상황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등장인물들 각자는 그 모두가 정신적인 타격을(가정부인 헬세스 부인을 제외한) 입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상대가 처해 있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로즈메르와 크롤 사이의 우정이라는 것도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방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한순간 이탈되므로 써 훗날 결속된다는 기묘한 관계다. 남에게 간섭하지 않고, 또 남에게서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인간관계가 전 희곡을 지배하고 있다. 로즈메르의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와 같은 의문은 그것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자아의 존재는 물론 상대방 자아의 존재도 인식한다. 두 주인공을 제외한 크롤, 울릭 브랜델, 피터 모르텐스가드는 그와는 반대로 문제를 모두 자기와 외부 라는 관계에서만 파악한다. 그러기에 주어진 여건을 수용하여 일순간 순종한다는 잘못된 인생관이 그들에게는 윤리로 되어있다. 레베카는 이러한 행동양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로즈메르는 자기의 '자유' 때문에 고충을 격지만 불평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겐 해서 좋은 일이 있고 해서 안 될 일이 있다. 레베카 역시 이 행동양식만은 잘 알고 있다. 레베카는 자신이 지난날 로즈메르에게 의지했다는 사실을 크롤에게 일러준다. 따라서 이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는 물질과 정신 양면에서 로즈메르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과거에 대한 후회는 로즈메르의 그것보다 더욱 처절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로즈메르와 레베카가 다시 결혼을 해야 한다고 크롤은 주장한다. 이것은 가뜩이나 아이러니컬한 극적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크롤은 두 사람의 보수당에로의 회귀를 위해 서로 간의 결혼을 원하지만, 로즈메르는 자기의 필요에 의해 결혼을 원한다. 레베카가 결혼을 원하는 건 로즈메르에 대한 사랑 때문이긴 하지만 지난날 그를 사랑한 죄의식 때문에 결혼을 종용할 수가 없다.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식하고 레베카는 최후 수단을 강구한다. 비타가 죽은 건 자기 자신 때문이며 그의 결백을 선언하여 그를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구원은커녕 그녀는 로즈메르를 다시 크롤이 속해있는 보수당에로의 회귀를 종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레베카의 삶의 포기와 과거 비타의 그것 사이에 생겨나는 아이러니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아이러니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건 극중 인물들이 그릇된, 아니면 적어도 부적절한 그들 개인의 원칙에 따라 극히 개성적인 행동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4막의 역할은 로즈메르와 레베카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그 뜻을 두고 있다. 여기서 입센은 비극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사후처리의 일면만을 우리에게 보여줄 위험을 무릎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할 사항은 우선, 입센이 이 4막을 어떤 방법으로 극의 필수부분으로 삼고 있으며 다음으른 어떻게 극의 진전을 도와주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전제가 확립되어야 비로소 그 다루는 방법론이 확립되겠기 때문이다. 3막까지 레베카는 로즈메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과거를 알 수 없는 현재 있는 대로의 모습만이 작품에 투영된다. 3막의 종반부까지 과거가 작품에 투영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리적인 면, 즉 로즈메르가 레베카를 과거의 자기 아내인 비타와 같은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받아들이고는 레베카와 같이 동반자살을 함으로써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는 면이 강조된다. 이러한 남녀 간의 애정관계로 말미암아 운명적인 죽음을 선택토록 하는 것은 입센의 상징주의 적 연극관의 핵심이다. 이 두 애인과의 관계는 그 종국에 있어선 입센의 초기 낭만주의에서의 남녀관계에 빚어진 운명과도 흡사하다. 레베카와 크롤의 관계를 볼 때, 레베카는 과거에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 상으로 와닿는 크롤보다는 용기의 전형으로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레베카까지도 본능적이고 정서적인 용기보다는 지성적인 용기의 심볼로 되어 있고. 초기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여주인공을 지성적인 존재로만 다루는 입센은 레베카를 용기의 요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레베카는 상징적으로는 크롤과 로즈메르 둘 다 그 갈등으로 부터 구해내어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려 하는 것이다.
레베카의 자백은 아직껏 불투명한 문제, 즉 그녀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는 데 절대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녀의 모습은 로즈메르와도 비슷한 이상주의자 아니면 묵묵히 투쟁하는 강인한 여성이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로즈메르에 대한 그녀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해소된다. 그런데 이런 열정은 그녀의 이기적인 면과 반이기주의 적인 면, 양면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입센은 마치 신비주의 작가처럼 하나의 중요한 정보를 즉석에서 제공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보류해 온 것은 아닌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일이 계획한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간다면 레베카는 진실을 밝히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백한 것은 실패의 징조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자백은 그녀의 성격이 변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레베카는 '로즈메르의 인생관' 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정복당했다. 로즈메르로 인해 그녀는 고귀한 사람이 되었고 또 그로 인해 '평온한 사랑'도 되찾았다. 따라서 그녀에겐 지난날 그를 괴롭혔던 바로 그 죄책감이 항시 따라 다닌다. 마침내, 로즈메르는 그녀의 옛 역할을 대신 떠맡게 되며, 그녀의 '과거는 사라졌다'고 레베카를 다시 안심시킨다. 그러나 입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즈메르의 갈등을 심리적 수법으로 취급해 나가고 있다. 비록 레베카에게 과거는 없다고 안심시켜주긴 해도, 로즈메르는 자신의 문제를 놓고 또 다른 회의에 휩싸이게 된다. 자신의 무죄와 명예를 되찾을 길은 없는가. 무슨 연유에서 레베카의 사랑에 그토록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가?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로즈메르의 레베카에 대한 불신을 입센이 그토록 강하게 우리에게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로즈 메르와 레베카 둘 다 이중적인 잣대를 지니면서 과거의 삶을 불신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마음 한가운데는 서로간의 불신이 만연해 있다. 그러한 불확실성을 해결하면서 극은 바야흐로 종국으로 치닫게 된다. 로즈메르솔롬을 떠나 멀리 자기가 태어났던 북쪽 땅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전에, 레베카가 동반자살을 기도하는 것은 로즈메르의 전 처인 비타에 대한 죄책감이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생 전반에 걸친 그 생존 자체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멸은 생존의 전면을 포괄하며, 그 자체에조차 환멸을 느낀 생존은 무의 심연에 빠져 주체성은 완전히 공허감으로 변모되며,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상실하고는 죽음의 피안을 찾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기도 후에 그녀가 찾은 '인도교(Fbot-Bridge)'는 비록 그것이 새로운 삶을 위한 돌파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레베카에게는 그녀의 허무주의의 초극으로 통하는 돌파구임에는 틀림없다. 이 돌파구는 새로운 삶의 전환과 재생으로서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것은 로즈메르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입센은 극중 인물들의 성격을 창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과 은유를 교묘히 배합하고 있다. 일반적인 관점은 그의 기독교적인 영향과 당시 스칸디나비아의 정치-경제적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빈번히 출현하는 상징과 은유를 그의 무대지시와 행동지시 그리고 두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파악해 보기로 하자.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심볼은 '인도교'와 '백모단원' 그리고 '저수지'다. 백모단원은 죽음의 강박관념과 현세의 무의미와 허무의 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인간이다. 이것은 로즈메르의 적대자인 크롤을 상징하며, 크롤은 로즈메르로 하여 시종 끈질긴 설득으로 로즈메르의 보수당에로의 회귀를 꿈꾼다.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등대지' 에다 로즈메르와 레베카에 대한 관계를 불륜으로 몰아 그들 두 사람을 협박한다.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성실한 태도를 연모하고 있으면서도 그 근거를 발견 치 못하고 있으며, 로즈메르의 보수당으로의 회귀가 아니면 자신에게 안식을 줄 궁극의 지주가 없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두 사람에겐 백모 단원의 전형으로 와 닿게 되는 것이다. 백모단원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크롤의 자세는 폭력세계에서 패배하여 절망상태에 있는 자세가 아니라, 로즈메르에게 부닥친 정신세계가 너무도 복잡하기에 그 공격의 수단으로써 취하는 심사숙고하는 자세인 것이다. 동적인 면에서는 로즈메르와는 대조적 이지만 그의 고민은 백모단원의 그것과 동일하며 상호보완적인 상징으로 자리 매김 되어 있다. 크롤은 로즈메르의 보수당으로의 회귀를 놓고 동일한 질문을 제시하며, 로즈메르의 현실의 이품을 인정하면서도 매번 동일한 요구를 한다. 백모단원은 인간의 건전한 윤리와 도덕을 찾으려 하지 않고, 폭력의 세계에서 행동을 통해 패배와 절망을 맛본 후 그것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개인주의의 심볼이기도 하다.
입센의 심볼리즘 중 특히 관객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여기서의 '저수지' 나 '인도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장소에 의탁해서 상징성을 표현하는 수법이다. 앞서 주지되었듯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투신행위는 남녀 주인공이 다 같이 현실사회와 결별하여 새로운 생을 구하여 낡은 것, 그러한 의미에서의 현실사회와 결별한 행위이다. 로즈메르 와 레베카의 현실사회에 대한 분노도, 현실사회에 대한 의무도 저수지 속에서 말끔히 정화되었으며, 그 속에서 두 사람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재생한 것이다. 새로운 삶의 길을 열었던 두 사람은 현실사회의 비난에서 말끔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에 대한 사고마저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 장소에서 두 사람은 이젠 정식 부부로서 하나가 된다. 입센은 저수지와 인도교를 상징으로 하여 관객에게 던져줄 궁극의 극적 해답을 찾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장소에서 두 인물의 동반자살에 주력한 입센 고유의 수법을 '지나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며, 자칫 비극적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다고 극한 선으로까지 비난하기도 한다. 아울러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심리의 집중에만 주력한 수법에는 작자의 상상은 삽입할 여지도 없으며, 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성격에 대해서 세밀한 묘사도 없이 그것을 관객의 상상에 맡겨버리는 입센 특유의 극 구성방식이다. 무대지시나 행동지시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무대소품, 의상, 음악, 대사 둥 어느 하나 상징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극은 비극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이 극이 대체 누구를 위한 극인지, 혹은 누구의 이야기인지부터 밝혀내어야 할 것 같다. 대개의 경우 로즈메르의 극이라고들 한다. 로즈메르에게는 정통주의와 급진주의, 합리성과 비합리성 등 두 상반된 관념이 동시에 작용한다. 다른 사람의 경쟁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바로 로즈메르이다. 그런데 이 극이 이러한 성격의 로즈메르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라면 비극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비극적 영웅이 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고, 그의 행동에는 폭력이나 그 개인에 특유한 비극적 모럴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겐 시종 과거에 대한 회상과 체념뿐이다. 그는 그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불현듯 과거의 악몽이 회고되려는 자기의 마음을 눌러버리고는 애써 과거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을 체념하려고 애를 쓴다. 과거는 로즈메르에게 항시 악령처럼 그의 뒤를 따라 다닌다. 이렇듯. 레베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분명히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그의 심리적 욕망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그에게는 뒤에 다 남겨두어야 할 그 무엇이 항시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한다. 그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무엇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인간이다. 그는 과거를 씻어 버릴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 레베카로 하여 정신적 부담을 지어주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이것이 현재의 행복을 되찾는 좁은 문에 이르는 수난이라고 생각할 때. 그러한 고통 속에서 도리어 그는 마음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고전주의나 셰익스피어 연극의 공통점은 대개의 주인공들이 격렬 한 죽음에 몸을 내던지고 생명의 긴장감에 직면한다. 그들의 모럴은 삶과 죽음에 엉킨 격렬한 행동만을 수반하는. 말하자면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그 순간순간에 의식되는 모럴이다. 입센의 전기 낭만주의 비극이나 중기의 사실주의의 주인공들의 모럴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의 모럴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비극적 영웅이라고 해서 꼭 그러한 모럴을 지니고 있어야 할까? 로즈메르는 그러한 모럴은 전혀 없다. 관객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나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그의 행동은 '파괴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다. 작품의 비극적 힘은 어디까지나 로즈메르의 심리적 요인에 의거한다. 로즈메르는 투쟁을 하지만 나약하게 투쟁할 뿐이다. 자 기 계획의 몰락은 미리 1막의 초기부터 그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러한 기운은 3막의 종반부에까지 이어진다. 용기와 살아야 한다는 의지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레베카이지만 그의 전처인 비타에 대한 죄의식과 처남인 크롤의 보수당으로의 회귀에 로즈메르는 삶을 포기하고 만다. 극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처는 모두 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취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겐 한충 더 심각해진 자기소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비참한 상태 속에서도 인생을 살아 나가기 위하여 자기에게 지워진 굴레를 벗으려고 발버둥치는 그의 인생태도야 말로 비극적이라 힐 것이다. 로즈메르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비타의 자살을 부추킨 자는 자기 자신이며. 로즈메르로 하여 그 모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혼신의 힘을 다 쏟는 자는 여주인공 레베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은 레베카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로즈메르의 경우는 비극적 인물이라기보다는 강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그의 운명은 그의 의지를 상실케 한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라면 이른바 고충을 당하는 선인이며 따라서 비극적 인 물이 될 수 없는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레베카는. 그와는 반대로, 특 별히 선하거나 악한 것도 아니다. 선과 악 양면을 다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성과 대단합과 용감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렇다 고 해서 레베카를 이 비극의 주인공으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가 뒤따르는 것 같다. 우선, 입센은 극의 초점을 레베카에게만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 2막에서 분명 레베카는 부수적 역할을 한다. 레베카의 지배적 영역은 3막과 4막 일부분이다. 문제는 등장인물의 지배영역이 아니라 입센의 인물성격 창조의 방법이다. 입센의 비극적 인물들은 실용적인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즉. 실용적인 세계에서는 행동의 결과에 의하여 판단되는 법이다. 그러나 입센이 그리는 세계는 그러한 행동의 결과에 의해서 가치판단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행동의 과정이후 결과라는 두 가지 요소에 가치의 기준을 두게 된다. 이 가치 기준따라 입센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을 배제하고 인간에게 미치는 정서적 충동과 연민의 정을 그 기본 테마로 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 극의 최대의 관심사는 로즈메르를 비타로부터 구해내려는 레베카의 결심이다. 레베카는 비타를 위해서 뿐 아니라 로즈메르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행동은 전적으로 자기희생적이다.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자기 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순간 극적 투쟁은 끝난다. 새로운 로즈메르솔롬의 개척이니 로즈메르에 대한 인간구제니 하는 것은 전부가 무로 돌아간다. 현실은 인간보다 강하며,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연이나 환경이나 유전 등의 맹목적인 힘에 좌우되는 것으로. 도저히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다는 관념이다. 인간의 생존은 무가치하며, 인간이란 허무하고, 생명도 허무하며, 오직 존재하는 것은 자연의 힘뿐이라는 입센의 자연주의 연극관이 「로즈메르솔롬」에서도 묻어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의 물리적 폭력으로부터는 가령 인간은 도피할 수 있다하더라도, 과거의 원죄로 인한 인간의 죽음으로 부터는 도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입센은 강조하고 있다.
입센의 상징주의 연극은 종전의 이러한 스칸디나비아의 전통적인 결정론에 대한 도전이며. 인간 개조 내지 인간 구제에 직결되는 길을 차단해버린 연극이다. 「로즈메르솔롬」을 입센이 허무와 죽음으로 정착시켰다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 수 있고, 그것은 확실히 당시의 사회적 관심사와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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