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경진 '뛰뛰빵빵'

clint 2015. 11. 6. 13:10

 

 

 

 

경기도 토박이이자 곧 환갑을 앞둔 혜자는 남편이 기침만 해도 벌벌 떠는 현모양처지만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던 시절, 운전기사였던 남편을 만나 맨손으로 버스회사를 일궈낸 억척여성이다. 세 아이들 건사에 경리일이며 기사식당 일까지 허리가 굽도록 일한 대가로 얻은 것은 나이에 비해 훨씬 노쇠한 골병 든 몸과 가족 사이에서 왠지 겉도는 듯한 소외감. 경기도를 대표하는 버스회사를 운영하는 둥 사업이 번창하면서 점점 생기가 도는 남편은 워낙 바깥일에 바빠, 마음에 쏙 드는 경리직원을 맏며느리로 맞아 일을 물려주고 집에 들어앉은 아내는 본체만체하는 데 다 하나 뿐인 딸마저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어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가문의 영광인 둘째 아들은 교수인지라 어렵기만하고 그나마 마음이 맞는 장남부부 역시 회사에 매인 몸……. 하여 그녀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생일이나 명절, 제사가 가장 기다려진다. 검소한 그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많은 음식을 준비해 푸짐하게 나눠먹는 일. 하지만 혜자의 남편 만석은 요즘처럼 음식이 혼한 세상에 다 먹지도 못할 음식 장만에 열을 울리는 아내가 영 못마땅하다. 그녀에게도 꽃 같은 시절, 보기만 해도 애틋함이 싹텄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자기 몸단속 하나 제대로 못해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는 막내딸의 상견례 자리에서 아내와 동갑임에도 세련미가 철철 넘치는 사부인 때문에 딸의 자존심은 바닥을 치고…… 최소한 자식들이 부끄러워하는 부모는 되지 말자는 게 만석의 바람이건만,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부스스한 몰골로 이바지 음식을 준비하다 남편에게 타박을 받게 된 혜자는 효부인 큰며느리가 해주는 마사지를 받으며 지난 생을 돌이켜본다.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가족들은 그 속을 몰라주고 이젠 정신마저 깝빡깝빡 할 때가 있으니 이러다 덜컥 치매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그런 불길한 생각처럼 딸의 결혼식 전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던 혜자는 혈관성 치매 판정을 받게 된다. 그녀에게 치매는 아주 사소한 건망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바지 음식을 장만하던 날 직접 만든 육포를 놔둔 곳과, 둘째 며느리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것. 그러다 마침내 딸과 사위조차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고 나서야 만석은 아내에 대한 무관심이 병을 키웠다는 사실을 절절히 후회 하고, 설상가상 행여 간병이라도 시킬까봐 지레 몸을 사리는 둘째며느리와 딸의 다툼은 그로 하여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자식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복덩이인 속 깊은 큰며 리의 변변치 못한 학력이나 볼품없는 집안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대놓고 교수인 둘째며느리를 애지중지함으로써 상처를 주었던 속물스러움이 귀한 아내를 짐스럽고 구차하게 여긴 것이다. 사업이 힘들었던 초창기, 아내에게 그 짐을 다 떠넘기고 한정식 집 마담 품으로 비겁하게 도피했던 만석은 그 사실을 알고도 여태 내색하지 않는 아내가 그때부터 음식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촌스러운 자신처럼 기사식당에서 남은 음식으로 연연하는 박찬을 지겨워한 남편이 행여 진수성찬에 빠져 또다시 한눈을 팔까봐 양껏 음식을 만드는 아내의 아픔을…… 결국 회사 일을 접고 힘겹게 간병을 해온 시어머니 때문에 부상을 당한 큰며느리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그 틈을 타 집을 나가버린 아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잊고 있었던 진정을 되찾게 된 만석은 자신이 아내 간병을 하겠노라 자식들에게 선언한다.
이듬해 봄, 모처럼 부부동반으로 부모의 성묘를 온 만석과 혜자. 병세가 더욱 악화된 혜자는 사리분별 못하는 아이로 돌아가 "뛰뛰빵빵”만 연발하지만 만석의 바람은 한가지뿐이다. 올 때는 따로따로 왔지만 갈 때만큼은 함께 가고 싶은 그녀와 내생에 다시 만난다면 그땐 꼭 자신이 아내로 태어나 이승에서 못 갚은 사랑을 다 갚아주겠노라고……. 그리고 만일 기적이 일어난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당신의 만찬, 달동네 단칸방에 딸린 코딱지만 한 부엌에서 조물조물 만들어낸 시래기나물과 비지찌개가 환장하게 먹고 싶다고…”

 

 

 

작의- 정경진
늘 그 자리에 있어 평소에는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어머니, 아내, 주부의 존재이다. 가족들이 각기 스스로 잘나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기는 동안 점점 부끄러운 존재로, 무례한 존재로, 소외감을 느끼며 가슴앓이를 하는 어머니…… 무식하지만 정직하게 살아왔던 그녀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궁핍의 시절이기에 고생은 차라리 액세서리와도 같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시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공간의 규칙을 망각하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 남은 가족들에게 회한과 부담감을 동시에 안겨 주는 그녀의 존재는 하염없이 과거 속을 배회하는 허깨비와도 같다. 그럼에도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가족…… 차마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온갖 패륜이 난무하는 삭막한 현실이지만 한 인간에게 세상의 시작과 끝은 가족으로 인해 가족으로 정리되는 것이 바람직한 순리라고 믿고 있다. 극중 버스는 가정을 의미하며, 주인공이 주문처럼 외치는 "뛰뛰빵빵”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유행가이자, 한 차를 타고 이동하 다가 누군가가 도중에 내려 다른 곳으로 향하더라도 언젠가는 같은 노선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가족공동체를 의미한다.
2008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카오스의 거울>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희곡활성화 사업 선정.<홍어>(2010 서울연극제 참가작)
해양문학상 희곡부문 우수상
2009 제3회 차범석 희곡상 당선.<푸르른 날에>
2009 김해시 창작마당극 희곡 공모 당선<이팝나무 가라사대>봉화군 전국 스토리텔링 공모 당선
2010 남해 소재 스토리텔링 공모 당선
2011 경기 창작 희곡 공모 우수상<뛰뛰빵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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