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하이너 뮐러 '호라치 사람'

clint 2015. 11. 1. 09:13

 

 

 

 

 

 

 

'학생들을 위한 극작품' 또는 "학습극"(브레히트가 예술 생산과 예술 소비의 접합 내지 봉합을 통해 상품 소비자와 같은 관객의 습관을 깨뜨리고 관객을 적극적인 생산자의 위치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급진적 시도다. 브레히트의 학습 극은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가르치기 위해 연기하는 것을 통해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개입하고 대처하는 변증법적 사고와 자세를 연습하는 학습 목표를 갖고 있다. 하이너 뮐러의<호라치 사람>은 이 같은 브레히트의 학습 극 이론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작품이며, 브레히트의 학습극《호라치 사람들과 쿠리아치 사람들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으로 규정되는 하이너 뮐러의<호라치 사람>은 1968년 불가리아에서 쓰였다. 뮐러의 말에 따르자면 이 작품은 1968년 실패한 '프라하의 봄’에 대한 그의 반응이자 하나의 코멘트다. 어느 쪽이 든 '프라하의 봄'에 대한 당파적 미화내지 변호에 저항하는 극작품인 것이다. 주인공인 호라치 사람은 승리자인 동시에 살인자라는, 어느 한쪽으로도 판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가지 성격, 이 모순의 통합체가 항상 남아있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폭력의 두 얼굴은 그 자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만 주장되는 역사의 거짓말은 언제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작품 소재는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가 기록한 다음과 같은 고대 로마의 비극적 전설이다. 로마 시와 알바 롱가(Alba Longa)시 사이에 지배권을 가리기 위한 싸움이 벌어진다. 두 도시는 각각 대표자를 세 명씩 뽑아 그들이 싸운 결과로 승패를 가리기로 협약한다. 로마에서는 호라치 가문에서 삼형제가, 알바에서는 쿠리아치 가문형제들이 대표자로 뽑힌다. 호라치 가문 삼형제 중 두 명이 결투에서 죽지만 마지막 남은 호라치 사람은 짐짓 도망하는 체하다가 그를 추적하던 중 부상당한 쿠리아치 형제들을 차례로 물리친다. 쿠리아치 형제 중 한 사람과 약혼했던 호라치 사람의 여동생은 자기 약혼자의 죽음에 비통해하여 호라치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킨다. 이 때문에 호라치 사람은 여동생을 찔러죽인다. 그 일로 자신도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민중은 로마를 위해 공을 세운 호라치 사람에게 극형을 면해 준다.

 

 

 

하이너 뮐러는 이 소재에서 양편이 싸운 결과로 일어나는 살인 문제를 역사 속 폭력문제와 연결해 재구성하고 있다. 뮐러는 억압상황의 역사에서 그 도구내지 희생자로 전락하는 인간의 모습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뮐러가 관찰하는 대상은 사회와 역사의 억압 상황에서 희생자로 전락함으로써 역사진행 과정에 객체로 남는 개인이다. 뮐러는 살인이라는 폭력 형태를 배경으로 역사 속의 개인을 더욱 분명하게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실제 우화와 달리 마지막 남은 호라치 사람 하나만을 등장시킨다. 이는 이미 작품 제목에 남성 한사람만을 뜻하는 정관사 'Der'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호라치 사람과 결투하게 되는 쿠리아치 사람도 호라치 사람의 여동생과 약혼한 인물 한 명만 등장한다. 두 사람은 로마와 알바의 공동의 적인 에트루리아가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각기 자기 도시의 전력 손실을 막기 위해 결투를 벌여야 할 대표자로 뽑힌다. 양 진영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이 대표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라는 '우연'의 형식을 통해 '개인'이 보이지 않는 강요에 의해서 역사의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더욱 이 이 개인들은 인척 관계이므로 이들에게 주어지는 억압적 상황은 그 무게가 더하다. 반드시 적을 죽여야 승리하는 결투에서 이 억압이 가져올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로마의 승리로서 호라치 사람이 여동생의 약혼자를 죽여야 하거나 아니면 알바의 승리로서 쿠리아치 사람이 약혼자의 오빠를 죽여야 하는, 역사의 대의와 개인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갈등이다. 여기서 제비뽑기라는 우연의 임의성이 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양 진영의 대립이 대화가 아닌 무기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갖고 있는 야만성을 지적하는 하나의 모델이다. 그러나 호라치와 쿠리아치, 양 진영은 이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가 갖는 어려움을 인식한다. 양 진영은 각기 두 사람에게 제비뽑기의 결과를 수정하기 위해 다시 제비뽑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도 호라치 사람과 쿠리아치 사람은 첫 번째 제비뽑기 결과를 고집하고 결투에 들어간다. 폭력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결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쿠리아치 사람은 호라치 사람에게 자신이 여동생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며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나 호라치 사람은 주저 없이 쿠리아치 사람을 살해한다. 호라치 사람은 가족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결투의 가혹한 윤리에 순종함으로써 과도한 폭력, 다시 말해 '불필요한 살인”을 행한다. 여기에서 시작된 "불필요한 살인”은 호라치 사람의 두 번째 살인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호라치 사람이 쿠리아치 사람을 죽이고 로마로 귀향해 승리자로서 군중에게 환호 받을 때, 여동생은 오빠를 승리자 로 환영하는 대신 오빠 손에 즉은 약혼자의 죽음을 애통해한다. 국가의 승리를 위해 적을 죽인 호라치 사람에게 여동생의 이 슬픔은 한낱 개인적인 감정일 뿐인 사소한 것이며 나아가 국가의 승리, 승리자인 자기 명예를 모독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라치 사람은 쿠리아치 사람을 죽였던 승리자의 칼로 여동생을 찔러 죽인다. 국가의 승리라는 대의명분 아래 개인적인 문제는 희생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때문에 호라치 사람은 “두 번 피 묻은 칼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에서 호라치 사람이 - 쿠리아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 왜 자기 진영의 재 추첨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투를 고집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우선 호라치 사람이 쿠리아치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 “내 신부는 로마다"라고 외치는데 이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애국주의를 나타낸다. 이어서 그는 자기 여동생을 죽여 "두 번 피 묻은 칼을 모든 로마인들에게 보임”으로써 다시 한 번 조국애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가족 관계를 무시하고 결투에 임한 데는 애국주의 이상의 동인이 존재한다. 그에게는 로마 승리 이전에 개인적으로 그 승리를 쟁취하는 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때문에 그는 쿠리아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동생 앞에서 “네 앞에 서있는 사람은 승리자니라,- 라고 강조하며 승리자인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여동생을 죽일 수 있다. 호라치 사람은 개인적인 명예욕을 조국애라는 대의로 합리화하고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는 태도를 보인다. 호라치 사람의 행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명예욕이 우연을 통해 역사 속에서 어떠한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한 가지 예다. 개인의 명예욕이 폭력과 연결될 때 일어나는 끔찍한 결과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역사는 희생 없이 이뤄지지 않으며 - 그 희생은 대부분 의미를 얻지 못한 채 잊히고 역사의 목표를 추진하는 일이 필요한 희생만큼 불필요한 희생까지 감수해야 히는 것이라면, 하이너 뮐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가 지닌 잔혹성을 인식하고 있다. 호라치 사람의 살인 행위는 독일 학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역사 과정에서 스탈린주의가 갖는 폭력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거나 아니면 조금 더 확장해서 스탈린주의라는 용어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사회주의 혁명사가 갖는 역사의 폭력성을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호라치 사람의 살인 행위가 내포하는 역사상 폭력 문제는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역사에 만 국한해 해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며 인류 전체 역사 차원에서 숙고해야 할 문제다. 실제로 역사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어떤 것이 합법적이고 필수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용인 받지 못할 단순한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하이너 뮐러가<호라치 사람>에서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호라치 사람의 첫 번째 살인(쿠리아치 사람 살해)에 대해서 아무런 반론이 없었던 로마 민중은 - 첫 번째 살인은 국가(집단)의 이익이란 대의명분 아래 용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호라치 사람이 여동생을 죽인 일에 대해서 두 편으로 분리된다. 한 편은 여동생 살인에 관계없이 호라치 사람을 승리자로 추앙하려는 쪽이고 다른 한 편은 여동생 살인에 대한 죄를 물어 호라치 사람을 심판하려는 쪽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로마를 위해 절대적으로 공헌한 호라치 사람이 필연성도 없이 여동생을 죽임으로써 로마 민중은 승리자에 대한 존경과 살인자에 대한 처형을 둘러싼 논쟁에 들어간다. 이 논쟁에서 요구하는 것은 변증법적 사고다. 호라치 사람이라는 한 인물에 살인자와 승리자라는 대립적 관계가 통 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모순이 현실에서는 하나로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사고와 인식 속에도 이러한 모순의 통합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남자가 한 남자 안에 존재한다.”라는 표현은 폭력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그 폭력의 도구와 희생자가 되어 있는 모순적인 인간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변증법적 인식 과정에서 뮐러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요구한다. 뮐러에게는 중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이 “하나의 목소라'로 답한다는 것은 중재자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여기에서 모순과 갈등이 만들어내는 대립 관계는 한층 부각된다. 호라치 사람에 대한 로마민중의 재판은 이 대립관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중은 자기 중에서 대표자 두 명을 뽑아 한 사람에겐 승리자라는 판결을 내릴 월계관을, 다른 사람에겐 살인자라는 판결을 내릴 참수형 도끼를 쥐여 주고 호라치 사람사이에 세운다. 양편 모두 자신들의 판결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남길 원하지 않는다. 즉 민중은 중립석 타협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명확한 구분”을 요구한다. 민중은 우선 호라치 사람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 그의 칼을 높이 들게 해 양편 모두 승리자에게 경의를 표하게 함으로써 승리자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 다음 월계관을 벗기고 참수형 도끼로 호라치 사람 목을 쳐 살인자라는 판결을 내린다. 한 사람 안에 모순의 통합체를 이루고 있었던 두 가지 요소 "승리자와 살인자, 공로와 죄"가 분리된다. 이제 호라치 사람의 시체에 대해서도 이에 상응하는 판결이 내려져야 한다. 호라치 사람의 시체는 우선 승리자의 시체로서 경의를 받는다. 그러나 "명확한 구분"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호라치 사람의 몸과 머리가 "대충” 끼워 맞춰지듯 처형과 존경은 불확실하게 얽혀 있다. “필연성도 없이 / 한 인간을 죽였던 자", 호라치 사람의 시체는 또다시 살인자에 대한 처형으로서 개들이 물어뜯어 흔적이 남지 않도록 개 앞에 던져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가 있다. 호라치 사람에 대한 평가를 후세에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이미 호라치 사람의 아버지는 호라치 사람의 시체가 개 앞에 던져지기 전에 호라치 사람을 승리자로 기억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승리자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완전한 진실이 아니다. 승리자 뒤에는 살인자가 존재하며 공로 뒤에는 죄가 존재한다. “반쪽짜리 예는 예가 아니다.” 숨기고 싶은 어두운 면과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역사는 그전체가 후세에 전달되어야 한다. 망각할 수 있는 다른 한쪽의 진실을 생각해야 한다. 로마 민중은 이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서로 대립되는 모순이 통합되어 있는 이 "명확한 구분”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역사 속 "깨끗하지 못한 진실”을 인식해야 한다. 로마 민중은 호라치 사람에 대한 판결을 이렇게 끝맺고 각자 자기 일로 돌아간다. "쟁기 이외에 해 머, 펀치, 철필, 그리고 칼을 잡고서.” 이 작품 마지막 부분은 호라치 사람의 살인을 판결했던 민중이 다시 칼을 잡고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는 살인이 끊임없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뮐러가 역사에서 보고 있는 폭력의 순환 구조다. 역사에는 대의라는 명목 아래 폭력, 테러적 조치들을 정당화한 예가 많다.<호라치 사람>에서 나타나는 세 번의 살인과 그에 대한 토론 과정을 통해서 뮐러는 이러한 폭력의 역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며 후세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연극 참여자와 관객이 함께 숙고해야 할 대목이다. 뮐러가 이 작품에 붙인 주에 “각각의 살인 이후에 연기자 한 사람이 무대 앞쪽 끝에서 빨간 수건을 떨어뜨린다.”라고 명기한 것은 그가 이 세 번의 살인을 똑같은 가치로 평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이너 뮐러는 이러한 살인으로 암시되는, 과도한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역사, 그리고 그 역사 전달과정에서 나타나는 "깨끗하지 못한 진실”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개인의 삶 또는 개인의 죽음이 갖는 진실 속에 통합되어야 할 역사적 대의가 반대로 이루어지는 비극적 배반 현상이 바로 현재 사회가 역사를 다루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한쪽 진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주장할 수 없는 그 상호 모순적인 대립 관계를 역동적 창조 관계로 통합하지 못한 채, 그것이 인간의 사고와 관습 안에 모순 자체로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 그 상황이 역사를 다룰 때 기회주의와 역사변조로까지 이어지는 모습 - 이것이 현 시대의 상황은 아닌지 뭘러는 묻고 있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치명적”이기에 역사를 전하는"말은 깨끗하게 남아야 한다.”. 여기에서 뮐러가 쓰고 있는 "말”은 일반적 의미의 '말'을 넘어 문학, 또는 역사 서술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있다. 하이너 뮐러는<호라치사람>이 보여주는 "잔혹한 변증법"을 이용해 역사 속 폭력을 논의하면서 문학이 진실의 전달매체로서 역사발전을 위해 완수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극작법의 형식으로 보자면<호라치 사람>은 드라마의 대화 형식, 즉 역할 분배를 포기하고 있어 연극참여자들에게 자유로운 무대 작업 공간을 제공한다. 또한<호라치 사람>은 서사시 형태로 고대 신화 번안과 운문 형식이 한 단계 더 발전한 “읽기 위한 시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상연하기 위해서는 연극 참여자들이 자신이 읽어야 할 텍스트를 선택해 결정하는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상연의 또 다른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텍스트에 대한 분석을 철저하게 할 수 있는 토론기회가 된다. 이를 통해 참여자들은 텍스트가 제시하고 있는 문제를 좀 더 숙고할 수 있다. 연기자와 관객뿐만 아니라 독자까지도 연극참여자로 계산한 뮐러의 실험정신의 소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