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남자가 평소 소중히 여긴 친구와 죽음의 여행길에 동행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우정, 친척, 재물, 미모, 지혜, 힘 등과 동행하려 하지만 죽음 앞에선 모두 그를 거부한다. 결국 그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참회와 선행이었다. 도덕극은 인간이 추구하는 정념이나 가치를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우화적인 연극이다.
어떤 부자가 어느 날 ‘죽음’의 부름을 받자 죽음의 여행길에 자기가 평소 소중히 여겼던 친구들을 동행하고 싶어 한다. 그 친구들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그가 살면서 좋아했던 가치나 덕목들이다. 그래서 그가 평소 아끼고 사랑했던 ‘우정’ ‘친척’ ‘재물’ ‘미모’ ‘지혜’ ‘힘’ 등이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돈독히 우의를 자랑했던 이런 덕목들은 결코 죽음의 길에 동행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의 목전에서 그를 구원으로 이끈 것은 ‘참회’와 ‘선행’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도움을 얻어 죽음을 맞이하는 부자는 비로소 참된 삶의 지표를 깨닫게 되면서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 이 여행길에 끝까지 동행한 친구는 ‘선행’이었다.
이 도덕극에서 죽음은 공포와 무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 약속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에브리맨’에서의 죽음은 공포와 무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 약속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첫 표현주의 희곡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부자의 죽음을 알리는 이야기」는 호프만 슈탈이 영국의 도덕극 Every-man을 토대로 재구성한 희곡 Jedermann : Das Spiel vom Sterben des reichen Marines: 번역한 것이다. 독일 피셔 출판사에서 1979년에 출간된 호프만슈탈의 전집을 텍스트로 삼았다.
작자는 알 수 없지만 그 원작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대를 초월한 범국민적 교과서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원작은 한 남자가 왕의 부름을 받고 성에 가게 되었다. 갑작스런 부름에 잘못한 건 없지만 말 그대로 "괜히 찔리는"마음에 그는 누군가 자신과 함께 가주길 바란다. 평소 가장 친하다 생각하며 가장 마음을 주며 곁에 머물던 친구 1을 찾아갔으나 그는 어이없게 문전박대를 당하죠. 죽을지도 모르는 길에 오히려 자신을 부른다고 말이다. 당황하여 친구 1보다는 덜 친했으나 가까이 두고 지내던 친구 2를 찾아갔으나 친구 2는 성문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으나 성 안까지는 자네의 일이니 혼자 가게, 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별로 기대하지 않던 그다지 친하지 않던 친구 3을 찾아갔는데 웬일, 친구 3은 그를 따뜻이 위로해주며 성안은 물론 왕의 앞에 가서 혹여 누명이라도 쓰게 되면 그의 결백을 증명해주겠다고 한다. 탈무드에서는 왕을 신으로, 성을 천국이라 설명한다.
친구 1을 재화, 재물, 즉 돈이나 부동산과 같은 물질적인 재산이고, 재산은 죽고 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천국에는 당연히 가져갈 수 없게 된다. 친구 2는 친지 및 친구들이다. 그들은 죽은 후 묘지까지는 따라오나 몸이 땅에 묻힌 후에는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산다. 친구 3은 선행입니다. 선행은 죽음 이후에도 그 영혼과 함께하며 신의 심판에서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증거가 된다. 에브리맨은 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야기이다.
그는 사신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피상적인 혹은 물질적인 가치들에게 냉대를 받은 후 역시 '선행'과 동행해 길을 떠나죠. 도중에 "참회" "개전" 등의 가치들을 만나 영혼의 정화를 거치고 이후 힘이나 아름다움 같은 가치들과 결별한 후 신의 법정으로 가 재판을 받고 죽음을 통해 내세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우리 삶에서 어떠한 것이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도덕극인 것이다.
작가서문 - 후고 폰 호프만슈탈
사람들은 종종, 독일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에는 원 작가의 이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동화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끝에 잊혀 지거나 변경 또는 덧붙임 등으로 해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그림 형제가 결정 본을 써주었습니다. 심판을 받기 위해 신 앞에 불려가는 ‘예더만’이라는 한 사내에 관한 이 이야기도 그와 같은 동화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중세를 거치는 동안 지속적으로 많은 지방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 후 15세기에 한 영국인이 개개 인물들을 실제로 무대에 등장시켜, 각자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대사를 입으로 말 하게 함으로써 전체 이야기를 각 등장인물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어떤 네덜란드인도 이런 전례를 따랐고, 이어 독일 학자들은 이 작품을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의 작품을 모범으로 하여 한스 작스는 죽어가는 돈 많은 사람에 관한 희극을 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모든 작품들은 독일 민중의 살아 있는 재산이라고 부를 만한 소유물로는 되어 있지 않고, 오직 유식한 유산 계급의 움직이지 않는 고인 물속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 자리에서 어느 시대에나 어울리는 보편타당한 이 동화를 다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시도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아마 나의 이러한 시도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훗날에, 미래의 어느 시대에 속하는 사람에 의해 다시 한 번 시도될 필요가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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