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세게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취객 회사원과 지하철 역사의 부랑자가 지하 상가에서 만나 꾸며내는 대화가 일상생활을 넘어 뒤틀린 현실을 꼬집고 물질, 산업사회의 권태를 고발한다.
남자 1, 2로 명명된 익명의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도심의 지하상가 안에서 만난다. 남자1은 부천에 사는 이과장으로 불리는 40대의 보통씨이다. 오늘은 그의 결혼기념일이고 이미 정지된 신용카드 네 장과 전화카드 한 장, 그리고 다소의 현금이 든 지갑을 지니고 다닌다. 그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고 너무나 왜소해 보이는 자신이 싫어 술을 마시는 샐러리맨이다. 쥐와 돈을 싫어한다거나 따뜻한 햇살 아래서 생의 무력함을 느껴본 개인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다. 남자2는 30대의 부랑자로 종종 소매치기하는 것으로 보이며, 자신을 신(神)이라 생각하고 있는 지식인풍의 외양을 지닌 인물이다. 여자는 20대의 스트립 댄서로 자신을 중시하는 남자들의 시선을 쾌락으로 받아들일 만큼 관능적으로 타락해있으나 무대 위에 서기가 죽기 보다 싫은 인물이다. 그녀는 이런 자신을 자학하고 있으며 현재는 일종의 알러지 현상으로 보이는 감기에 걸려 있다. 이들은 별다른 인연 없이 도심 상가 안에서 마주친다. 남자2는 남자1의 지갑을 소매치기하고 남자1은 여자가 잃어버리고 간 지갑을 가지고 간다. 여자의 지갑을 유용한 문제로 남자1과 2가 다툼을 벌이고 남자는 남자1을 지하철 레일 위로 밀어버린다. 이같이 인물들의 개인사적 이력과 사건의 개요만을 추렸을 때 이 극은 마치 범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현실적이지 않은 이들의 만남과 일상적 의사소통과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상징적 의도로 조립된 듯한 대사의 연결고리 등을 볼 때 단순한 사건의 흐름으로 해석할 극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추출해 본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사건조차도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대로만 믿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면서 더욱 난해한 극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심사평 "페러디와 상상력 돋보여"
우선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은 희곡 작품 응모수가 41편이나 됐다는 사실이 다. 희곡문학이 영상매체에 밀려가고 있다는 우려를 뒤집고 아직도 젊은이들의 후속부대가 건재하고 있다는데 무한한 신뢰와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질적인 면이나 희곡문학의 특질을 놓고 보았을 때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희곡(연극)은 현실의 반영이자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현실의 복사나 재현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다는 의도 아래 일상적인 것을 아무런 여과나 극적 구성이나 상징성도 없이 마구 나열하는 작품이 많았다. 그러므로 주제의식이나 윤리성이나 진실의 추구보다는 병적(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소재와 비속하고 치졸한 언어의 유희로 통속적이고 TV극의 아류같은 작품이 많았다는 점은 유감이었다. 희곡은 상연을 전제로 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도 희곡적인 구성(구성)과 언어의 농축(농축)을 무엇보다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소설이나 TV드라마와는 또다른 특성을 지녔고 오락성이 아닌 연극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종심까지 남게된 작품은 "혼선"(위기훈), "그림자"(장미화), "안전선에서 기다려주십시오"(이지한) 그리고 "실족"(송호준) 4편으로 압축되었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재치와 신선감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혼선"은 감원문제를 둘러싼 직장인들의 심리와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했지만 암전(암전)이 잦은데다가 부장이 여사원에게 성희롱하는 장면의 설정은 통속극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림자"는 선천적 정신박약아를 분만한 부부의 갈등을 소재로 한 비교적 무거운 작품이나 죽은 어머니의 환상이나 "난쟁이 그림자"의 구사가 설득력이 약한 게 결점이었다. "안전선에서. "는 필력과 대사가 탄탄하고 극적인 요소가 매우 짙은 작품이나 4장으로 구성한 점은 장막극을 단막으로 무리하게 축소시켜 버린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검사가 폭행당하는 계기가 좀더 심도있게 표현되지 못한데서 일종의 통속극이 되고 말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실족"은 적절한 페러디와 요설과 희극성이 풍부한 상상력을 통하여 부조리연극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데다가 무엇보다도 무대적 기교를 비교적 알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물론 불필요한 말의 남용은 옥의 티라는 점을 밝힌다.(차범석,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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