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거실에서 한 부인이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놀라지만 곧 친구의 장난임을 눈치챈다.
친구는 비가오는 날이면 부인의 죽은 옛 애인 흉내를 내며 전화거는 버릇이
있었다.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황제'를 듣다가 전화를 걸어 불러내면,
부인은 진짜 애인에게 전화가 온 것으로 착각하고 비를 맞으며 나가곤 했다.
그때 남편이 거실로 나온다. 남편은 3층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후각을 상실했다.
그 소송건으로 전화를 기다리던 그는 전화를 끊으라고 하지만, 부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신문에 난 한 철학교수의 죽음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한다.
철학교수는 투병중이던 아내가 죽자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 15층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부인은 철학교수의 순애보에 감동하나, 남편은 그의 자살을
아내의 죽음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것에 대한 비관이라고 몰아붙인다.
둘은 부인의 애인이며 남편의 친구였던 선우진의 죽음을 떠올리며 논쟁한다.
남편은 철학교수와 선우진이 죽음으로, 영원한 사랑을 얻지만 자신은 후각을
상실하고도 단지 500만 원의 돈을 얻게 될 따름이라며 부인을 비난한다.
하지만 부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전화에만 몰두한다.
이때 초인종이 울린다. 의사가 소송에 관련된 진단서와 의견서를 가져 온다.
남편과 의사는 서재에서 대화 중 철학교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의사는 교수의 죽음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다. 그는 철학 교수가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자신의 환자였고 그의 죽음이 신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교수는 아내가 심장병에 걸려 추한 모습이 된 것을
못견뎌 하다가 결국은 아내를 죽였고 그 죄책감에 자살했다고 한다.
둘은 이어서 소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의사는 소송에 대해 낙관적이다.
이어 변호사가 방문한다. 변호사는 전화를 계속 걸었지만 통화중이라서 직접
오게 되었다. 이때 관리책임자도 방문을 한다. 넷은 소송에 대해 논쟁한다.
관리인은 후각을 잃은 것이 부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변호사와 남편은
아파트 관리를 제대로 못한 잘못이라고 말한다. 논쟁 중 이야기는 또 한번
철학교수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변호사는 원인을 실족사로 보고 썩은 난간을
방치한 책임 회피를 위해 병원의 관리인들이 미담을 꾸며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관리인은 죽음의 원인을 교수의 나약함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각자
서로 다른 주장으로 모두 싸우고... 결국 화난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

밤 11시. 부인은 여전히 전화를 걸고 있다. 거실로 들어온 남편은 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한다. 변호사, 의사, 관리인과 나눴던 대화를 녹음하여
들려주려 하나 부인은 여전히 관심이 없다. 이에 남편은 500만 원을 받을
고소장을 찢어버리지만 부인의 관심을 살 수는 없다.
결국 그는 선우진의 죽음이 자신 탓이라는 고백을 한다.
부인은 잠시 관심을 보이지만 다시 전화에만 매달린다.
젊은 시절 촉망받던 수재였던 자신보다 별볼일없는 철학과 학생을 사랑하는
부인을 보며 남편은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 게다가
죽음이 선우진을 더욱 미화시키고 영원히 젊은이의 모습 그대로
부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패배감에 젖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부인에게 냄새를 맡을 수 없다고 호소하고는 베란다에서
몸을 던진다

15층에서 투신자살한 철학교수의 사건이 그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소시민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든다.
맹목적인 삶이 붕괴되고 그 자리에 음악과 바다와 바람이 스며든다.
대화 없는 부부싸움의 기묘한 갈등 끝에 다시 창문이 깨지는 소리.
그것은 누에가 꼬치를 뚫고 새로운 세계로 환생하는 소리이다.
그래서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

이 작품의 주제는 황폐한 기계문명사회에 있어서의 인간회복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러한 주제를 다루면서 예술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은, 선우진을 비롯하여 아내 그리고 남편같은 주인공들이 D.H.로렌스가 말한 인물들로 하여금 비인간적인 세계와의 통로를 차단해 버리고, 신(神)의 소리를 상징하는 '황제'의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본질적인 인간의 내면세계와 더불어서만 대화를 하게끔 한 것은 위에서 밝힌 이유 때문이리라. 여기서 본질적인 내면세계는 곧 우주(宇宙)의 본질과 이어지고, 또 생명의 원천을 상징하는 바다와 연결되어진다. 그래서 작가는 아내로 하여금 지평선 저쪽으로 사라진 선우진 결코 죽지 않았다고 말하게 하며, 또 상업적이고 기계적인 문명사회에서 벗어나 바다가 상징하는 인간의 본연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수평선 너머 위험수역으로 헤엄쳐 간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의 원천으로 회귀해 가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탐색을 위해서 미지의 세계로 항해해 간다는 휴머니즘적인 의미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마지막 장면에서 후각을 잃은 남편이 창문에서 뛰어내릴 때 보인 인간적인 용기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주목을 요구한다. 그는 이 연극이 시작될 때부터 비인간적인 요소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왔었으나, 마지막에 아파트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린 순간은 그것과 죽음으로 대결하여 이긴 것이라 하겠다. 그의 용감한 죽음은 패배자의 죽음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과 인간정신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다.

<작가의 말 - 이어령>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세균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것을 또 배양해야 한다. 이러한 의학의 역설이 연극의 세계에도 존재한다. 극장무대는 우리들 생의 아픔을 바라보는 현미경이기도 하고 그 불길하고 우울한 세균을 키우는 실험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극은 행복할 수만은 없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것, 잊어 버리고 싶은 것...이런 것들을 깨워서 일으킨다.
두 번째의 내 희곡도 한 인간의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건강하고 유능하고 야심이 있는 한 인간이 어째서 창문으로부터 추락하고 마는가? 아내와 냉장고와 TV와 안락의자와 말하자면 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뛰어내리는 것일까? 나는 그 좌절을 통해서 도리어 병든 생으로부터의 회복을 찾아보려고 했다. 아마 이 연극을 보는 당신도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행복감속에서 도취해 있거나, 또는 그 것을 추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도 '죽은 자' 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갑자기 그런 것들이 무의미해 지는 충격을 받게 된다. 결국 우리는 살아있는 자들과 경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죽은 자들과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것이 더욱 본질적인 생의 문제가 된다. 다만 살아있는 자(일상인)와 죽은 자(본질적 인간)가 경주를 하는 이 경기장에는 금빛 트로피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경주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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