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멜리 노통 '불쏘시개'

clint 2015. 10. 31. 20:46

 

 

 

 

 

2002년 12월 프랑스 일간지 '피가로'는 문학 평론가 스물아홉 명을 선정하여 1962년 이후에 출생한 작가 중에서 프랑스 문단을 이끌어갈 가장 유망하고 중요한 작가를 꼽으라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평론가들은 모두 마혼 명의 젊은 작가를 선정했는데, 그중에서 아멜리 노통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벨기에와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35개국에서 번역되어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수많은 독자를 몰고 다니는 아멜리 노통이 프랑스 문단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아멜리 노통. 마치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1년에 한 권 씩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 스스로를 〈무턱대고 쓰고 싶어 하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고 밝히는 작가. 서랍 깊숙한 곳에 발표하지 않은 작품 50여 편을 감춰 두고 보물창고 드나들듯 혼자 들여다보기를 즐기는 작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진한 차(차 속에 들어 있는 카페인을 자신의 친구라고 할 정도로 차 마시기를 즐긴다)를 마시고 여덟시까지 네 시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글을 쓴다는 아멜리 노통은 글을 쓰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 힘들다고 단언한다. 그녀가 여행하는 건 다만 자신의 책을 위해서 일뿐, 오로지 집에 틀어박혀 글쓰기를 즐긴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것은 〈글쓰기〉라는 짧은 한마디이다.
문학 평론가의 찬사보다 아멜리 노통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독자들이 그녀에게 보내오는 편지.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독자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직접 답장을 써 보내며. 자신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아멜리 노통. 다른 평범한 생활인처럼 시장에도 가고 청소도 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하며, 음악에, 영화에, 독서에 빠져 든다는 아멜리 노통은 자신이 잉태한 작품을 한 권씩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무한을 품고. 어떤 제약도 느끼지 않으며 특별한 운명을 약속하는 이름을 주기>를 원한다. 아멜리 노통은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읽고 나서 새삼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털어놓는다.

 

 

 

아멜리 노통이 1994년에 발표한 유일한 희곡 '불쏘시개'는 약 3백매밖에 안 되는 분량에 한 장소에서 등장인물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한창 전쟁 중이고 날씨는 몹시 춥다. 폭격과 총알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가면 세상은 끔찍하고 무자비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도처에서 죽어간다. 생의 온기는 다 빠져나가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대학의 문학 담당 교수가 자기 집에 자신의 조교와 그 여자 친구를 머물게 한다. 이 두 사람은 전쟁으로 잠잘 곳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두 남자와 한 여자가 한 공간에 교수의 서재에 숨어 있다. 불을 피우고 따뜻하게 있으려면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의자와 거대한 서가의 책들. 그 외에 태울 거라곤 전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태울 것인가? 여학생 마리나가 교수의 두 팔에 안겨 잠시 몸을 녹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무인도에 혼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라는 진부한 질문이 아니라 이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내고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책을 가장 먼저 태울 것인가라는.

 

 

 

아멜리 노통은 책을 태워서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설정하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추위와 전쟁과 주해 책을 몽땅 불태워야 한다면 그때 책의 내용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여겼고 때로 인간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던 책은 이 극한 상황에서 다만 두께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멜리 노통은 세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책은 세상 사람이 위안을 얻는 구제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태워 버릴' 책이 없으면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책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책은 우리가 죽어도 남을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또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책을 불태우는 행위는 우리의 문화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쟁에서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타인과의 전쟁이든 자신과의 전쟁이든 간에.
아멜리 노통은 세 사람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지신이 갖고 있는 책에 대한 애정을, 거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문화(문학을 포함한)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가, 아닌가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이 아니라 문화가, 곧 책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제 삼고 있다. 그녀에게 책은 세계관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니까.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는가. 아멜리 노통은 책을 쓰기 위해서 살지만 우리 독자는 책을 읽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닌가. 아멜리 노통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삼 삶의 주제를 새롭게 물어보고 있다. 천재 작가 아멜리 노통은 이 희곡 작품을 통해서도 역시 동서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상상력, 잔인하면서도 거침없는 유머, 삶에 대한 아이러니,
독설로 가득한 은유를, 그녀만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은 책이지만 매우 매력적이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할 정도로 아멜리 노통의 등장은 마치 페스트처럼 독자에게 전염되어서 책을 읽은 사람 모두를 중독 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는 가학과 피학과 악의와 잔혹함이 어우러진 노통의 세계를 단정적으로 정의하고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그녀는 여전히 젊고 마치 말 하듯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독자 들을 놀라게 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현대의 어느 한 시점, 겨울. 벌써 2년째 전쟁 중이다. 밖에는 폭탄과 총알이 날아다니는데다 살을 에는 추위마저 기승을 부린다. 잦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대학교 주변 문학담당 교수 집에 젊은 조교와 그의 여자친구 등 3명이 숨어 지낸다. 젊은 남녀는 전쟁으로 잠잘 곳을 잃었다. 이들은 그동안 폭격으로 허물어진 건물의 기둥 따위를 구해와 간신히 추위를 면했지만 이젠 그것도 다 떨어졌다. 그런 어느 날, 50대 교수와 조교 다니엘이 말다툼을 하는 서재에 조교의 여자 친구 마리나가 들어와 난로에 손을 대본다.
책을 불태우면 전쟁에 진다는 상징, 책을 태우면 사람을 태우는 상황으로 갈 거라는 암시, 학자들이 책을 한 단계 나아가는 도구로만 여긴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희곡의 끝 부분에선 상황이 역전된다. 처음 책을 태우면 안 된다고 고집했던 교수는 추위에 못이겨 마지막 한 권 남은 책마저 태우겠다고 하고 마리나는 “그건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라며 태우지 말 것을 간청한다. 나아가 “우리는 오랫동안 더 이상 없을 거고 이 책은 우리가 죽고 나서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책은 끝내 난로에 던져지고 폭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밖으로 울부짖으며 뛰쳐나가는 마리나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독자들은 다시 한 번 ‘책이란 무엇인가’란 상념에 빠져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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