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탕크레트 도르스트 '검은 윤곽'

clint 2015. 10. 31. 20:10

 

 

 

 

<검은 윤곽>(1995)은 언뜻 외국인과 결혼한 지식인 가정이 가족 간 갈등 때문에 무너지는 과정을 담은 가족 극처럼 보인다. 가장인 말투스는 계몽주의자 레싱의 사상을 받아들인 학자이며 사회비판적 사고의 소유자다. 아내인 릴은 리트비아 인으로 아들 베니가 장애아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 말투스와 릴은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둘째 아들 옌스는 극우단체에 들어가 스킨헤드가 되어 매번 말투스와 충돌하며, 한 흑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선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딸 예니퍼뿐으로 그녀는 끔찍한 가족 관계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가족 간 갈등을 그린 단순한 가족 극이 아님은 이미 도입 글에서 드러난다. 이 텍스트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우리의 삶은 공포 그 자체다. "온 세상이 비명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양손으로 귀를 막은 사람들이 뛰어다닌다. 도르스트가 보고 있는 세상은 맑은 하늘 아래. 자기 몸 을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그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저격수들이 "검은 천사"처럼 누군가를, 아니 우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다. 나 자신에겐 모두 다 위험한 존재인 끔찍한 세상이다. 도르스트는 이 같은 파멸의 세계상을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인식하도록 만든다. 비명. 다급한 발소리, 점차 확대되어 나를 덮쳐오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 무너지고 부서지고 및기고 조각 난 파괴의 그림들, 텍스트는 독자의 청각과 시각, 모든 감각을 깨워 일으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가족의 모습이 구체화하기 전, 도르스트는 이 가족의 삶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분명하게 안내한다.
다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공포와 폭력 행위의 소리들을 점차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분명히, 아주 가까이서. 때로는 아주 멀리서부터, 마치 메아리처럼, 아니면 서서히 나타나는 끔찍한 사건의 시작처럼.
평범한 듯 보이는 집이다. 느닷없이 테라스 유리문이 박살나며 흑인 남자가 출현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유리문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관객의 긴장감과 무대를 향한 집중도를 높이는 강한 자극이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그는 옌스가 살해하는 유색인 역할 이외에 다른 인물 또는 사전에 별 관련이 없는 인물로 머문다.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무대에서 이 인물은 마치 상징적인 사물 혹은 이물질 같은 낯선 존재로 따로 떨어져 있다. 시작부터 낯선 것이 무대를 채운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자해하고 신발을 달라고 요구하는 그의 행위 또한 아무 이유가 없는 낯선 행위다. 이 낯설음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대면하고 있는 말투스의 태도 또한 낯설다. 말투스는 혹인 남자를 상대로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투스는 "검둥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만큼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고 고통스럽게 돌봐야 할 장애아 아들이 있으며 아내 릴은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범죄소설만 읽는다. 둘째 아들 옌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기쁨이었어.”란 과거형 표현으로 현재 옌스가 이 가족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첫 장면이 관객에게 주는 정보는 말투스의 가족이 불행하며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점점 말투스 가정의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말투스는 폭력적인 인간을 계몽해야 한다는 주제로 대통령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후원하고 참여하는 거창한 강연회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인류의 조화를 꿈꾸는 지식인, 학자다. 또한 그는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집에 있는 모든 문을 열어놓는다. 열려있는 그의 집, 그것은 말투스 자신이 열려 있는 사람임을 내세우는 상징과 다름없다. 그는 고귀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개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미 사랑이 사라진 아내를 구타하는 행위는 그가 추구하는 인간애 사상과 거리가 멀다. 그가 추구하는 계몽 정신은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말로만 그친다. 계몽주의 대표자 레싱을 신처럼 신봉하는 만큼, 관용과 인류애를 설파하는 그의 말은 거창하다. 늘 동료에게 이상주의라 조롱당하고 아내에게 말이 너무 많다고 비난당하는 것에서 보듯, 그는 자신의 빈말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다. 말투스는 끊임없이 말하고, 아내 릴은 침묵한다. 릴은 가끔씩 조롱하면서 말투스의 말을 끊을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했으나 그저 가끔씩 남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게 유일한 복수인 양 집안에 낯설게 존재할 뿐이다. 자유롭게 키운 둘째 아들 옌스는 극우단체에 가입하고 유색인을 혐오하는 스킨헤드가 되어 아버지와 대립한다. 옌스는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았던 녹음기를 이용해 요양원에 가있는 형 베니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녹음해와 가족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가족의 고통을 장난에 이용한다. 그는 가족조차 믿지 못한다. 누나 예니퍼에게 모래와 돌만 들어 있는 상자를 주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부탁해 누나의 신뢰를 시험한다. 그는 결국 흑인 남자를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해 아버지까지 법정에 서게 만든다. 예니퍼는 이런 가족 사이에서 고통만 느끼며 힘없이 부유하는 존재다. 말투스의 가정은 겉으로만 정상일 뿐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
말투스의 가족이 안고 있는 끔찍한 상황은 바로 우리가 현재 안고 있는 모습 그 자체다. 말투스를 비롯한 가족구성원이 보여 주는 태도는 현재 우리의 태도 그대로다. 가면 뒤에 숨은 실체는 상상보다 더 끔찍한 모습일 수 있다. 인간의 친구로서 세상의 악에 맞서 비인간적인 세계를 개선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말투스에게 그의 동료 슐레테 박사는 자신을 비롯, 말투스와 같은 지식인의 본모습을 오히려 솔직하게 드러낸다.
슐레테 박사의 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겉으로만 양심적이며 기득권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실체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말투스가 가진 모순처럼 슐레테 박사가 지적하는 현대사회의 숨겨진 모순이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면 조화로운 인간 사회에 대한 꿈은 가망 없는 싸움과 같다. 새롭지 않은 이 같은 인식이 영원히 계속될 뿐 변화가 오지 않을 세상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악몽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도르스트는 예니퍼의 입을 빌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렇게 비유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죠. 밖에 있는 아름다운 초원, 덤불을 바라보는 거예요. 거기엔 작은 새 한 마리가 팔짝팔짝 뛰어다니면서 아주 사랑스럽게 지저귀고 있어요. 우리에겐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죠. 그런데 그게 사실은 불안에 떠는 비명으로 가득한 공포의 장소인 거예요. 모두가 굶주려 있고, 탐욕스럽고, 그리고 적의에 차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서로를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거죠.
예니퍼의 남자 친구로 등장하는 은행원 올리버는 에니퍼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비인간적인 사회의 암울한 측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도 없으며 관심조차 없다. 가장 세속적인 것의 상징이라 할 돈을 다루며 아무런 의식 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그는 생각 없는 현대인을 대표한다. 그러나 세상은 예니퍼의 비유처럼 상대를 죽여야 살아남는 전쟁터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비명이 사라지지 않는다. 옌스가 녹음해언 베니의 비명, “사람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은 세상의 비명이다. 비명 가득한 세상에 인간의 조화로운 삶은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말투스는 인류의 조화를 주제로 한 강연회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흑인 남자를 살해한 옌스는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릴은 늘 그래 왔듯 개 두 마리를 키우는 것이 삶의 전부다. 말투스는 집을 나와 쓰레기장에서 망가지고 낡은 캠핑카를 집 삼아 살아간다. 캠핑카 안에 있는 것들 또한 모두 정상이 아니다. 차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더럽고 곰팡이가 슬어 있다.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상이 아닌 이 모든 것은 작가 도르스트가 보고 있는 현재다. 이 거대한 기형의 현재에 말투스는 무기력하게 패배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의 계몽주의 사상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쓰레기장에 사는 아버지를 찾아온 예니퍼는 절망한다. 그녀의 절규, 그것은 암울한 미래밖에 남지 않은 현대인의 외침으로 들린다.
인종주의, 착취, 폭력. 억압. 비인간적인 모든 것에 맞서려던 말투스는 좌절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폭력을 반대하면서도 내면에 살아 있는 폭력을 어쩌지 못하는 모순을 안고 있는 그는 결국 우리 중 한 사람,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마지막 장면, 그의 입에서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금기시하던 차별의 폭력적 단어, "검둥이"가 튀어나온다. 그는 첫 장면, 발에 피 흘리는 흑인 남자의 모습으로 "검둥이”를 부른다. 스스로 억압당하는 자 편이 되어 자신은 여전히 세상의 불합리와 싸우고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 모습은 오히려 기득권충의 기만과 가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피라고 주장하는 벗은 발의 붉은 것, 그것은 자기가 쏟아 부은 케첩이다. 케첩이 범벅된 맨발로 그는 춤을 춘다. 가식의 춤으로 가득한 세상, 그 세상을 죽은 흑인 남자가 유령처럼 나타나 바라보고 있다.
<검은 윤곽>은 특정한 사건이나 줄거리 없이 13개의 독립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인종주의, 낯선 것에 대한 배타성. 폭력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비인간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다. 탕크레트 도르스트는 이를 파괴되어 가는 말투스 가정을 통해 보여 준다. 극은 말투스 집이라는 사실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사실적 상황과 유리되는 이질적인 요소로 흑인 남자와 흑인어머니들이 등장함으로써 사실과 환상이 결합하는 독특한 표현 형식을 보인다. 때문에 작가가 이야기하는 공포의 세상은 개선이 시급한 사실로 인식되는 동시에 마치 악몽 속 한 장면처럼 읽힌다. 도르스트가 보고 있는 암울한 세계상은 극단적인 비관주의라 할 수 있고, 추상적이며, 어떤 면에서도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인식은 날로 비인간화가 심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장 시의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검은 윤곽>은 세계화 과정에서 외국인 혐오와 착취, 배타적 이기주의 등 현대사회의 전형적인 갈등이 드러나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도 시의성 강한 시대극으로 수용될 가치가 충분하다.<검은 윤곽>이 제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질문, 그것은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소개
탕크레트 도르스트(Tankred Dorst, 1925~)는 독일 튀링겐 주, 오베를린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기계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1943년 나치노동 봉사에 소집되고, 1944년 군에 징집되어 서부전선에 투입된다. 거기에서 포로가 된 뒤 영국과 미국 포로수용소 생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1947년 말, 서독으로 석방된다.
도르스트는 1950년, 밤베르크 대학에서 독문학과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고, 1951년 뮌헨대학으로 옮겨 독문학과 연극학을 전공한다. 1953년부터 대학생 인형극단 '작은 놀이'에서 극작과 연극 경험을 쌓으며 극단을 위한 인형극 텍스트를 쓴다. 본격적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에 발표한<커브(Die Kune)>를 튀베크에서 초연해 성공을 거두면서 부터다. 같은 해<가을의 사회>가 만하임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뒤 주목받기 시작해 지금까지 독일연극 계에서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사람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다른 작가와 달리 그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점은 공동 작업에 의한 집필방식이다. 도로스트는 1971년 텔레비전 영화<잔트>를 작업하는 동안 우르줄라 엘러를 알게 되었고, 이후 엘러는 도르스트의 삶의 동반자이자 공동 집필자로 서거의 모든 도르스트 작품에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탕크레트 도르스트의 작품은 강한 정치성과 역사성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지닌 문제, 자기기만과 인간성 상실, 소통 두절,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낯 설음 등을 독특한 개방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의 연극 작업은 다른 이들의 모 습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말 한다.
"삶과 글쓰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흥미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흥미다. 연극에 필요한 본질은 타인에 대한 흥미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신에 대한무언가를 다시 발견한다."
도르스트의 희곡은 변화하는 정치와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나'의 위치를 돌아보게 만들며 '나'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극작가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준<톨러(Toller)>(1968)는 유럽에서 변혁을 추구하는 68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쓰였다. 1919년 뮌헨에서 혁명의 선두에 섰던 인물인 톨러를 주인공으로 혁명의 의미와 개혁을 요구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룬다. 도르스트가 이 작품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혁명과 관련한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 자체이며 '새로운 인간'이라는 표현주의적 꿈과 이상이 안고 있는 한계다. 그렇기 때문에 톨러는 정치 현실에서 거리가 먼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회 발전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독자와 관객은 톨러를 통해 개인으로서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톨러>이후 도르스트의 작품은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톨러>를 포함한 정치 극 경향의 희곡들로<잔트>, 〈빙하기>( 1973)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로<침보라소 정상에서>(1975), 〈빌라>(1980),<하인리히 혹은 환상의 아픔>(1985),<검은 윤곽〉등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중세 기사에 관한 전설을 각색한 것으로<메를린, 혹은 황무지>(1981),<파르치팔(1987>,<가련한 하인리히 의 전설>(1997)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또한 단순하고 개인적인 가족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의 사회문제를 역사와 관련시켜 반영한다. 여기에는 인물들의 회상을 통해 과거 기록이 현재와 연결되어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드러내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이용되고 있다. 도르스트에게 과거는 현재와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재를 판단하고 변화를 인식할 수 있는 토대와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르스트가 전설을 소재로 또 다른 작품의 범주를 구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중세 마술사 메를린을 소재로 세계 평화를 논한<메를린, 혹은 황무지>는 공연 시간만 8시간 이상 걸리는 300쪽 분량의 대작으로서 독일 연극계에 기록될 만한 작품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메를린이 아르투스와 협력해 전쟁이 사라진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지만 파르치팔로 상징되는 인간의 야만적 폭력성 때문에 세계 평화가 깨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도르스트는 단순히 폭력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역사적 변화 기능성을 그대로 열어 놓고 있다. 도르스트의 시각으로 본다면 현재는 한 가지로 규정하거나 어느 하나를 주장할 수 없는, 변화하는 상황 자체다. 그러나 그 변화를 아무 의식 없이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변화의 상황에 존재하는 인간을 관찰하고 늘 새로운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인간을 발전으로 이끄는 연극의 역할이다.
우리는 언제나 조화롭고 평화로운 인간적인 세상을 표방 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현실은 이상적인 세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르스트는 이 처럼 늘 좌초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연극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최근에도<황무지(2005),<예술가>(2008>,<난 심기증 환자를 연기해보아야 한다>(2010)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탕크레트 도르스트는 독일의 권위 있는 연극 지 《오늘의 연극(Theater-heute)》로부터 1994년 '올해의 극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밖에도 돌프그림 상(1970), 바이에른 예술아카데미 문학대상(1983), 뮐하임 극작가상 (1989), 게오르크 뷔히너 상<1990),H.T.A. 호프만 상<1997), 막스 프리시상(1998), 뮌헨 문화상, 유럽문학상 (2008), 실러 상(2010) 등을 수상했다. 이런 사실은 독일연극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것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