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강백 '북어대가리'

clint 2017. 12. 13. 10:41

 

 

 

「북어대가리」는 같은 환경 속에서 대조적인 인생관을 지닌 두 인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 내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 「북어대가리」는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이 인간다운 삶을 말살당한 채 상품의 논리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현대인의 전형이라는 것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두 인물은 그들이 보관하고 유통시키는 상품이 현대 산업 사회의 산물이었으나 역으로 현대인을 억압하는 요소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짜여진 계획에 따라 상품은 보관하고 유통시키는 반복적인 행위를 기계적으로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의 형상을 무대화시킴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은 서로 대조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앙을 의붓어미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임을 잘 보살펴 줄 수 있었고 창고를 벗어나도 또 다른 창고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창고를 벗어나려는 기임을 만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믿었던 기임이 떠나 버리자, 이 세상 모든 것은 옳고 바르다는 존의 믿음과 그것에 대한 회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고뿐만 아니라 그 외의 세부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어야만 극적 행위들이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같은 환경 속에서 대조적인 인생관을 지닌 두 인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추적한<북어 대가리>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연극의 중요 기능인 발견(혹은 인식, An-agnorisis)의 문제를 진지하게 모색한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은 먼저 극장 입구부터 쌓아놓은 상자들과 무대 가득히 객석까지 압도하는 상자더미를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상품 유통의 현장이자 닫힌 사회를 반영하는 창고라는 환경을 통해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또한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경직된 머리만 있고 실천(혹은 실현)의 도구인 손과 발, 몸뚱이가 없는 (마치 '북어 대가리'와 같은) 인물 자앙의 삶과,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율적인 판단 없이 무조건적으로 숨막히는 현실을 탈출하는 인물 기임의 삶이 각각 개연성을 확보하고서 전개되었다.

 

 

 

 

 

작품<북어 대가리>는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이 인간다운 삶을 말살당한채 상품(혹은 자본)의 논리에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현대인의 전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두 인물은 그들이 보관하고 유통시키는 상품이 현대 산업 사회의 산물이었으나 역으로 현대인을 억압하는 요소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짜여진 계획에 따라 상품을 보관하고 유통시키는 반복적인 행위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인물들의 형상을 무대화시킴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이와 같이 폐쇄된 환경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왜소해진 인간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이 작품이 부조리 연극의 하나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물음을 묻는 베케트 식의 경향과 사회 구조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핀터 식의 경향이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작품<북어 대가리>는 이와 같이 긍정적인 측면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 상호간의 관계와 인물의 형상화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문제점을 간단히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작품이 결국 자앙과 기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다면, 두 인물 사이의 갈등, 대립 양상이 좀더 진지하고 다양한 톤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희곡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보다 치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 공연에서는 갈등, 대립 장면이 점층적으로 쌓여가는 과정이 약화되었다. 즉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결과적으로 떠남과 머뭄이라는 결말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연기자들이 유형화된 연기를 펼칠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되었다. 인물의 형상화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은 서로 대조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 자앙은 환경과 역할에 만족하고서 기존의 보수적 논리에 충실한 인물, 현실에 안주하는 인물, 더 나아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로서 형상화되었다. (그러므로 보수적 세계관의 화신인 자앙에게 굼벵이라는 별명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자앙은 의붓어미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임을 보살펴줄 수 있었고, 창고를 벗어나려는 기임을 만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믿었던 기임이 떠나 버리자, 이 세상 모든 것은 옳고 바르다는 기존의 믿음과 그것에 대한 회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아마도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지키려는 확신이 보다 강한 듯 보였으나, 번민하는 모습 자체가 오히려 극적이지 못했다. 또한 자앙의 번민 장면이 꼭 필요햇더라면, 언어적 독백보다는 더 연극적인 방법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자앙을 곧바로 일상적인 삶 속으로 몰입하게 함으로써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자앙에게서는 현실적인 원칙주의자의 모습과 함께 어떤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고뇌가 우화적으로 그려진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기도 했다.

 

 

      

 

자앙과 대조적인 입장의 기임은 현실에 늘 만족하지 못한 채 적당주의와 요령주의로 일관된 삶을 살다가, 결국 불안정한 미래에 몸을 내던지는 행동주의자로 그려져 있다. 그는 세상은 모두 잘못됐고, 어느 것 하나 옳게 된 것이 없다는 인식을 얻고 나서, 창고를 벗어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창고 안의 세계와 창고 밖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현실을 벗어나려는 무모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머뭄과 떠남이라는 상반된 결말에서 그에게는 떠남의 계기 마련이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의 행동 전반에서 자앙의 것에 비해 사실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차분한 성격의 자앙과 대조시키기 위해 기임에게는 좀더 외향적인 연기를 요구할 수도 있었겠으나, 과장된 연기와 발성은 디테일적인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기임에게 현실 탈출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자앙에게 현실을 회의하게 만든 부수적인 인물 트럭 운전수와 미스 다링도 상당히 전형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다. 트럭 운전수에게는 직업을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부여함으로써 인물의 직능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구사하는 방언과 능숙한 화투 솜씨를 통해 여러 곳을 굴러 다니면서 약육강식의 세상 이치를 몸으로 터득한 인물임을 효과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그는 네 인물 가운데에서 가장 선명하게 개성이 살아 있음으로써 인물 사이의 매개적 기능을 충실히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창고지기의 애인이었던 미스 다링은 쾌락에 더 비중을 두게 함으로써 인물의 성격과 구도가 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밖에 장면과 장면을 연결시켜 주는 음악의 분위기가 창고라는 호나경과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느낌을 준다든가, 트럭은 객석 뒤쪽에서 도착한 것으로 그려지는데 경적 소리는 무대 앞쪽에서 울린다든가 하는 등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700개의 상자를 꼼꼼하게 배치하고 창고의 서까래가지 만들어 놓은 무대 미술사의 노력은 크게 돋보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고뿐만 아니라 그 외의 세부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어야만 극적 행위들이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북어 대가리>는 과도한 상업성과 말초신경적 자극성, 그 밖에 과도한 이념성에 짓눌렸던 기존의 창작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이 작품은 받아먹기는 쉽지만 소화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결국 우리 체질에 잘 맞지 않는 번역극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우리 연극계에 훌륭한 대안 제시가 되리라 믿는다.

 

 

 

 

 

연극을 다 보고 나서도 도대체 이 <북어대가리>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필자를 두고 작가 이강백이 ‘거 봐라!’ 식으로 웃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와 관객은 어쩌면 그렇게 주제를 놓고 숨바꼭질을 하는 관계인 모양이다. 왜 하필이면 ‘북어대가리’인가. 이야기 줄거리는 창고 속에서 상자를 지키는 두 사나이의 우여곡절을 적고 있다. 하나는 고지식한 창고지기 자앙(전무송)이고, 또 하나는 불성실한 기임(최종원)이다. 기임을 위하여 자앙이 북어국을 끓여 먹인다거나 그가 떠난 휑한 창고에서 자앙이 홀로 멀뚱멀뚱 눈을 뜬 채 아가리를 벌린 북어대가리와 마주보고 섰다든지 하는 정경만으로는 작품<북어대가리>(1993. 3.28일까지, 성좌소극장)의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다.
북어국의 재료로서 북어대가리는 극히 일상적인 삶을 반영한다. 삶의 상투성을 정면에 내세워 놓고 작가 이강백은 다른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그것은 창고라고 하는 물품이 드나드는 공간과 그 공간에 기대어 사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주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사건을 부각시킴으로써 오히려 그런 삶이 지닌 괴이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해석하면서 비로소 나도 조금은 이 작품에 대한 접근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부조리 연극이 지닌 삶의 무의미성이나 그 흔한 대화의 단절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만큼 리얼하게 연극은 진행되는 것이다. 우선 무대구성에서 우리는 철저히 계산된 장치와 소도구의 배치에 놀란다. 성좌소극장은 완전히 창고 속이다. 연출 김광림(金光林)의 성실성이 드러나는 무대는 쌓인 상자가 만들어내는 다섯 겹의 벽면 장치로써 작은 무대를 크게 확대한다. 무대가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두 창고지기의 언행 또한 극히 사실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마터면 이 연극이 부조리극 계열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여기에서 이강백식 우화(偶話)적 부조리극이 지닌 현대성과 세계성을 한국적 주제로 부각시킨 김광림 연출의 냉철한 사실주의적 계산을 간파하지 못하는 경우 관객은 자칫하면 ‘웬 북어대가리!’하는 식으로 종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북어대가리는 일상의 한낱 외피에 불과하다. 그것을 끓여 먹거나 대가리와 마주하며 심각한 생각에 빠지거나 그것은 우리 사념의 매개일 뿐이다. 작가나 연출가가 노리는 것은 창고라는 공간에 들어오고 나가는 상자들의 확인작업과 거기에 종사하는 객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인 것이다. 이 작품에는 주인의 부재가 암시적으로 거론된다. 틀림없이 보관되었다가 정확하게 내보내지던 상자의 질서가 기임의 작은 반역으로 깨어지면서 자앙은 잘못 반출된 상자의 주인에게 보낼 편지를 쓴다. 그러나 창고 속의 공간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주인의 소재는 탐색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게 주체와 하나가 되지 못한 존재는 그 두 창고지기만이 아니다. 뭇 남성을 편력하는 다링(안효진)과 트럭운전사 겸 노름꾼인 그녀의 아버지(정운봉) 또한 어쩌면 일상성의 탈을 쓴 삶의 괴이함을 육화했다 할 것이다.
그렇게 가장 현대적인 테마를 다루면서도 토속적이랄까, 한국적 정서가 묻어나는 북어대가리의 이미지로 현대의 삶을 반문하는 이 작품은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연극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작은 그룹 ‘극·발·연’의 첫 공연 작품은 좋은 작가와 연출가를 만났으며, 서로 잘 어울리는 앙상블 속에서도 자기 개성을 확보한 네 연기자들 또한 저마다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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