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조당전은 인사동의 단골 서점에서 750만원을 주고 『영월행일기』란 제목의 고서적을 구입한다. 이 책은 500년 전(세조3년(1457년))에 신숙주의 하인과 한명회의 여종이 당나귀를 타고 영월을 오가며 순전히 한글로 쓴 최초의 일기이다. 당시 영월에는 왕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난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세조와 조정 대신은 단종이 유배지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자 종들을 밀정으로 보낸 것이다. 조당전의 동료인 ‘고서적연구동호회’ 회원들 사이에는 『영월행일기』의 진위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동기는 책의 진가에 의심을 품고 이의 판단을 위해 화학처리용으로 책을 한 조각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조당전은 글자가 없는 공백 부분을 한 조각 잘라내다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려 책에 얼룩을 남긴다. 나중에 진본임이 확인된다. 그들은 조당전의 서재에 모여 『영월행일기』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입증시킬 수 있는 고서적 자료들을 분석, 연구한다. 세조와 단종을 둘러싼 과거의 일들이, 고서적 연구가들인 염문지, 부천필, 이동기의 개인적인 성격과 연계되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인사동의 고서점을 통해 『영월행일기』를 팔았던 김시향이 조당전을 찾아와 그 책을 되돌려줄 것을 간청한다. 그 책은 자기 남편 모르게 훔쳐 판 책으로 남편은 대단히 분노하여 책을 찾아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즉, 김시향과 그녀의 남편은 마치 옛날의 주종관계와 똑같다. 조당전은 김시향에게 『영월행일기』를 되돌려 주는 조건으로 그 책의 내용을 재현할 것을 제안한다. 김시향은 나무로 깎아 만든 당나귀를 타고 한명회의 여종으로 분하고, 조당전은 신숙주의 하인으로 분하여 당나귀의 고삐를 잡아끌면서 영월을 다녀온다. 그러나 그 여행 공간은 조당전의 서재이면서 아울러 세조 당시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세 차례 영월을 다녀온다. 그들은 첫 번째 갔을 때 단종의 얼굴은 무표정, 두 번째는 슬픈 표정, 세 번째는 기쁜 표정이다. 세조는 단종의 무표정과 슬픈 표정에는 살려주었으나, 기쁜 표정에는 참지 못하고 사약을 보내 죽인다.
단종애사를 소재로 한 이강백의 「영월행 일기」는 역사의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단종 시대와 현실을 극중극 형태로 오버랩 시키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현실과 과거를 교차시키면서 정신적 풍요의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은 실제와 같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하다.(청령포, 금포비, 단종의 역사 등등) 만약 역사적 사실을 꿰뚫고 있는 독자나 관객이 이 작품을 보게 되면 역사적 사실과 연극적 상상력의 차이에 대하여 묻게 될 것이다. 연극적 상상력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오기도 하고 그것과의 차이로부터 더 부풀려지기도 한다. 이 점은 작가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할 부분과 상상력에 의해서 변형될 수 있는 부분들을 언급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가는 허구의 안으로 역사적 사실을 끌어들인다. 허구의 공간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의심한다. 즉 사실이 부풀려 진다. 역사적 사실들이 반성을 하게 되는 공간은 그것들의 실체 공간을 벗어난 허구의 공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권력처럼 역사적인 사실, 그 자체로서는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허구는 사실을 껴안고, 그것들의 실재에 대하여 회의한다. 그 결과 역사적 사실은 허구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궁극적 실재를 확인하고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참고 자료
<영월행 일기>의 주제는 선명하다. 인간에겐 내면의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 그 내면의 자유가 보장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사회는 두려움으로부터 풀려날 수 없다는 것, 그 두려움은 다양한 상상과 감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주제이다. …<영월행 일기>에서 나는 등장인물이 영월로 가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런데 영월로 가는 길은 그들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그들은 그 길을 가면서 나비도 보고 꽃도 보는데, 사실 무대 위에는 나비와 꽃이 없다. 바로 이 없는 나비와 꽃을 관객들이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하는 것, 마치 노련한 판토마임이스트가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사과를 따서 관객에게 내밀 떄, 관객은 분명히 그 사과를 보는 것과 같다. (1995년 연출가의 말 중)
이강백 작, 채윤일 연출의<영월행 일기>(극단 쎄실) 역시 극중극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강백은 여전히 부당한 권력의 압제와 그 희생자들, 그러한 희생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다. 이 작품은 매우 특이한 발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영월행 일기>는 극중극의 명분이 뚜렷한 편이다. 고서적 연구 동호인들이 각자의 성격에 따라 세조와 단종을 둘러싼 세력들의 갈등을 분석함에 있어 역사 속의 인물들로 클로즈업된다. 한편 조당전은 애초에<영월행 일기>를 인사동에 내 놓았던 김시향(이화영 역)이라는 여인이 나타나 남편의 분노를 이유로 책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자 그녀와 함께 책의 내용을 재현하는 연극놀이를 시작한다. 여기서 여인의 ‘주인’인 남편은 어디선가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통제하고 있는데 이 역시 과거에나 지금에나 상존하는 지배자의 억압으로 상징된다. (<공연과 리뷰>1996년 겨울호, 김미도)
세조 당시와 오늘날의 시점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영월행일기는 자유를 수용하는 인간의 태도가 역사를 통해 영원히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향신문 1995년 9월 7일, 조운찬)
이강백의 희곡<영월행 일기>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장미의 이름>의 구조는 거의 같다. 이들 작품에서 말하는 것은 배우와 인물이 아니라 ‘책’들이다. 그 책들은 신숙주의 하인과 한명회의 여종이 쓴<영월행 일기>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쓴<시학>이다. 이들 작품은 책의 봉인을 뜯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 이 연극은 책을 읽되, 끊어지는 이야기, 사건, 인물들로 구성된 책의 여백과 만나게 한다. 독자이며 관객들은 하인과 여종이 쓴 책을 통해 지배계급의 검열과 억압, 그리고 의식에 의해 감출 수밖에 없던 사고의 여백을 찾아야 한다. 이강백은 이 부재를 강조한다. 부재란 억압에 의해 만들어진 텅 빈 흔적이며 인물들이 의식적으로 사고 밖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던 매듭임을 말한다. 그것이 관객들이 풀어야 할 몫이라고, 연극이 회복해야 할 힘이라고 말한다. …<장미의 이름>에서 처럼, 이 작품은 많은 책을 엮어 놓았다. 그 책들은 세조와 단종의 ‘시대’라는 책,<영월행 일기><이조실록><해안지록>와 같은 책들이다. 이 책들은 서로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공연은 이 책들을 겹겹이 쌓아놓고 서로 연결하고 변형시키고 있다. 연극은 책 속에 봉인된, 의심받지 않은 진리를 뜯어내어 진리란 때로는 아무 데도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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