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이 위기나 역경에 처하게 되면 퇴행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인간이 고향과 어머니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반동 형성으로 나타난 퇴행의 한 유형이다.이런 유형은 대개 지난날의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함으로써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서의 쾌감을 맛보는 유아 유희로 나타난다.퇴행에는 이런 유아 유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 유희도 있고,죽음 유희도 있다.직장에서 상사에게 질책을 받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섹스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성 유희에 해당하고,갑자기 부딪친 절망적 현실에 대하여 죽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죽음 유희에 해당한다.인간은 절망적 현실에 부딪칠 때 누구나 한 번쯤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고,심한 경우에는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그러나 인간에게는 퇴행을 다스리는 힘도 축적되어 있다.작가가 자신의 퇴행 욕구를 창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5월 8일까지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된 이하륜의 [아리랑 정선]은 바로 퇴행 욕구가 승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작가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한국 전쟁중 1.4후퇴로 잃은 것은 유년이요 얻은 것은 자유였다.'(이하륜,[작가의 글]에서)는 작가의 말처럼 어린 시절에 잃은 것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 창작된 것이 [아리랑 정선]이다.이하륜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한동안 아버지 없는 설움을 가지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그 아버지가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은 집을 나간 지 17년 후였다.그리고 그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8년동안 집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이런 체험을 한 이하륜은 자연히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아리랑 정선]은 이런 아버지가 없었던 어린 시절을 다시 보상받고 싶은 욕구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여진다.주인공이 12세 신랑과 12세 소꿉이가 설정되어 혼인 잔치라는 통과 의례를 거치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곧 아버지 나이가 된 그가 극중에서 꼬마 신랑이 되어 어린 시절 가져보지 못했던 행복을 추구하고픈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아리랑 정선]은 정선 아리랑 민요에 나타난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의 한을 희곡으로 변용한 작품이다.이 작품은 애초부터 정선 아리랑의 비극적 분위기를 배면에 깔고 있다.꼬마 신랑의 결혼이라는 호기심과 함께 한동안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던 흐름이 절정 부분에 가서 신랑이 소꿉이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사건으로 반전되는 데서 그 비극성이 더하게 된다.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유아 유희와 성 유희와 죽음 유희가 공존하는 놀이적 요소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유아 유희는 작가의 퇴행 욕구가 12세 '신랑'으로 변용되어 나타나고,성 유희는 등장 인물들의 신방 훔쳐보기에서 나타난다.이것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신랑의 통과 의례 과정이면서,그동안 이야기하기를 금기시해은밀한 것으로만 다루어지던 섹스를 밝은 곳으로 내보임으로써 존재의 본질에 자리잡은 성을 부각시킨 것이다.지장구와 산골네가 각기 여장과 남장의 가면을 쓰고 성행위를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이 가진 성 욕구를 진실하게 반영해 보겠다는 것이며,신랑과 각시의 성욕을 대리 만족시키는 것이다.죽음 유희는 소꿉이에 대한 연정 때문에 19세 각시와 결혼하기를 거부하는 신랑의 죽음으로 나타난다.이것은 기존의 잘못된 인습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는 주제 의미가 함축돼 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하륜이 죽음을 자연의 이법으로서의 유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곧 사랑과 이별,결혼과 죽음을 인간으로서 당연히 거쳐야 할 질서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곧 정서적인 면에서는 슬픔을 유발하지만 이성적인 면에서는 신이 설정해 놓은 질서에 동참하는 유희라는 이중 구조를 마련해 놓고 있다.
[아리랑 정선]은 전통 민요의 원용이라는 측면과 놀이적 측면이 중심축으로 되어 있다.그리고 그 흐름은 이면적으로는 비극성을 내포하지만,표면적으로는 유희로 나타난다.성 유희와 죽음 유희가 그것이다.이는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퇴행 욕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어 놀이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그러나 마당극적인 놀이 요소가 강조된 나머지 신랑의 죽음이 가지는 주제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점,짧은 대사로만 일관한 점 등은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1980년 이맘 때 쯤, 춘천의 허름한 극단에서 열 명 남짓한 연극배우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배우들은 뜨거운 몸짓으로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대사를 토해내고 있었다. 춘천의 대표적인 극단 「혼성」이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을 위해 준비하는 『아리랑 정선』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무대장치가 그리 화려하지 않았던 때라 무형의 소리를 단순한 무대 위에서 형상화한다는 것도 어려웠지만 30여 수가 넘는 정선아리랑을 무대에서 부르는 것은 갑절의 연습이 필요했다.
극단 「혼성」이 정선아리랑을 무대에 올리게 된 데에는 향토적인 주제를 추구하는 열정 때문이기도 했다. 극단의 연보를 보아도 『메밀꽃필무렵』, 『한오백년』 등 향토성 짙은 내용을 다뤄 기틀을 다져왔다. 이에 따라 연출을 맡은 최지웅 선생이 자연스레 강원도를 대표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자 했고, 극작가 이하륜 선생은 이러한 뜻에 보답코자 늘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라나고 있었다는 정선아리랑을 다듬어 대본을 완성했다. 마침내 『아리랑정선』은 1980년 11월 2일과 3일 춘천 시립문화관 무대에 올랐다. 정선아리랑이 1971년 강원도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밖에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을 당시 『아리랑정선』의 반향은 컸다. 이틀 간의 공연장은 만원을 이루었고, 이듬해 내용을 다듬어 다시 무대에 올렸다. 정선아리랑에 사로잡힌 극단 혼성은 1984년부터는 아예 제목을 『정선아리랑』으로 바꿔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정선아리랑이 단골 레파토리가 된 것이다. 그 무대도 강원도에서 전라도로, 해외로 넓혀갔다. 1984년 6월 3일에는 광주 남도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두 차례나 공연해 소리의 고장이라는 남도 땅에 정선아리랑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1989년 2월 15일부터 인도의 북부도시 찬드갈 파티알라 루디안에서 국제아마추어연극협회(IATA) 인도지부가 주최한 연극제에서 『정선아리랑』을 무대에 올려 장려상을 받고 세 차례나 앙코르공연을 해 갈채를 받았다.
3막으로 된 『정선아리랑』은 여량의 부잣집 총각이 정선 한치 처녀와 결혼, 신방을 차리러 신부집에 왔다가 가난과 폐쇄된 공간에서 소꿉친구를 못 잊어 되돌아가다가 아우라지 강물에 빠져 죽는 내용이다. 가련하고 비극적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두메산골 마을 정선과 정선아리랑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찌들대로 찌든 가난과 조혼의 풍속에 얽매여 정(精)과 한(恨)을 노래하는 젊은 남녀의 사연이 가슴 찡하게 하는 내용이다.
이 공연에서 배우들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대회에 참가한 전 세계 연극인들과 인도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또 현지 신문과 방송에서도 한국의 서정을 연상케 한다며 내용이 연일 보도되어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주머닛돈을 털어 가며 연극으로 정선아리랑을 소개하는 데에 한 몫을 톡톡히 했던 극단 혼성(混聲)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1996년 봄, 하마터면 잊혀질 뻔했던 『아리랑정선』을 극단 「민예극장」이 김태수 선생의 연출로 다시 서울 문예회관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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