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복근 '덕혜 옹주'

clint 2017. 10. 29. 14:33

 

 

 

작가의 말 , 정복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의 부인 윤씨가 지녔던 그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위엄을 생각하면 우리 왕가의 여인들이 엄격한 전통속에서 배워 지키는 기품, 그 철학과 자기단속의 정밀함은 함부로 논하기에는 너무 고귀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맞닥뜨린 역경과 싸우게 마련일텐데 일본의 범죄적인 야만성앞에 홀로 내던져졌던 열 네살된 소녀는 그 혹독한 볼모의 인생을 무엇으로 싸워 지켜나갔던 것일까 혹시 침묵의 칼은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실존했던 인물을 주제로 삼아 작품을 쓰는 일은 조심스럽고 마음이 쓰인다. 실존했던 인물과 가상의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여 어울리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잘못해서 실존했던 인물이나 주변 인물들을 왜곡시키거나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필요이상으로 비하시키게 되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게 된다. 실제로는 옹주가 귀국할 때까지 생존해있던 유모 변복동 할머니와는 다른 인물을 유모로 상정하여 연극을 진행하면서 나는 이 작품 속의 모든 인물들이 그 자신들의 실제 삶이 그랬던 것처럼 옳거나 그르거나 다 그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갖고 서있기를 바랐다. 흔히 역사는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남의 시각에 의해서 잘못 보여지고 의도적으로 모욕받았던 한 시절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로 보는 일이 바로 우리식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시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청승맞은 패잔이나 한의 이야기가 아니라 떳떳하고 의로운 투쟁의 기록으로 풀어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전당이 기획한 우리시대의 연극 네번째인<덕혜옹주>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면서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시의적절하다함은 금년이 광복 50주년이라 하여 여러가지 기념행사들이 벌어지는 중에 연극계에서는 아직 그와 연관된 이렇다 할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음과 무관하지 않다. 1960년대 초 덕혜옹주의 귀국기사를 읽었음직도한데, 필자 자신도 잠시 그야말로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할 정도로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잊음은 실상 그가 상징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최근 세사를 잊고 있었음을 뜻한다. 자신들의 왕은 천황이라고 떠받들면서도 점령국가의 황녀는 정신병원에 구겨 넣은 채 잊고자 한 일본이나 이를 방관한 한국이나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었음을 뜻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사태는 개인적인 사연에 그 연원을 두고 있지 않다.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이기주의를 집단이기주의로 증폭시킨 결과일 뿐이다. 그러기에 정략결혼에 의해 덕혜옹주를 아내로 맞게된 쇼다케시 백작이 관객들에게 파렴치한 인물로만 보여졌다면, 그와 같은 초상은 적절한 것이 되지 못한다. 대마도 번주의 아들이기에 일본황실과 조선황실 모두에게 일정 정도의 콤플렉스를 지닌 인물일 수는 있어도, 그 역시 개인적으로는 나름대로 교양인이면서 집단이기주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해석이 가능했음직하다. 성격창조에서 다소간 이견을 느꼈다 할지라도, 이 공연은 서두에서 말한대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주제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연기력의 진지성도 그와 같은 감동에 크게 기여했다. 13세 소녀로부터 50세가 넘은 치매성 환자에 이르는 다양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윤석화를 비롯하여 이주실, 원근희, 강신일, 한상미의 호흡이 고르다. 젊은 연기진들도 절제된 힘을 표현해내는 데 무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흑색을 주조로 한 기본색조와 잘 어울리게 배색한 조명과 영상처리가 깔끔했고, 음악도 극의 흐름과 잘 어우러졌다. 극전반에 걸쳐 한태숙의 통제력이 돋보인다. 다만 전체적으로 유연성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이 문제는 공연이 익어가면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조선일보 1995년 5월 5일, 김문환)       

 

 

 

 

 

연극<덕혜옹주>는 실어증에 걸린 덕혜옹주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무대에는 검은 장막에 날카롭게 찢긴 흰색 천이 드리워져 암울한 시대와 옹주의 비극을 상징했다. … 이어 고종의 외동딸로 태어난 덕혜옹주가 13세의 나이에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는 장면과 대마도 번주와 결혼 후 아이를 빼앗긴 채 이혼당하는 장면 등이 계속되자 객석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부 여성 관객들은 아예 손수건을 꺼내들고 눈물을 닦기도 했다. 우리 전통 무술의 움직임을 활용한 동작과 무대를 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일본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는 듯했다. 무려 57년 만에 고국땅을 밟은 덕혜옹주가 왕실예복을 입고 객석에 절을 올리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날 출연배우 가운데 덕혜옹주역을 맡은 윤석화씨는 머리를 짧게 깎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극도로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등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를 보여줬다. 연극이 끝난 뒤 열린 심포지엄에서 일본 극작가 사에쿠사 가쓰코는 “그리스비극을 연상시키는 감동적인 연극이었다”면서 “덕혜옹주 개인의 비극을 한일 민족사의 비극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연극배우인 히나 료코는 윤석화씨의 연기에 감탄사를 연발했고 연극평론가 이시사와 슈지는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특히 여성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음을 새삼스레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덕혜옹주의 실물

 

 

조선왕조에서 왕비가 난 딸은 공주(公主)라 불렀고, 후궁이나 그 외의 여인에게서 난 딸은 옹주(翁主)라 불렀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하여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고, 덕혜옹주는 귀족의 딸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시종의 조카와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1925년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어 여자학습원에 입학한다. 조선에서는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자 영친왕과 함께 덕혜옹주도 귀국해 순종을 알현한다. 그러나 순종황제가 얼마 안가 승하하고, 모친 귀인 양씨마저 사망하게 되니 덕혜옹주는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라 귀족에 포함되지 않아,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 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정신장애인 진단까지 받는다. 그러던 중에도 ‘덕혜옹주’는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한다. 혼기가 된 덕혜옹주는 옛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결혼을 하게 된다. 소 다케유키는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인데다가 그림재주가 뛰어난 청년이다. 1932년 두 사람 사이에 딸 소 마사에(宗正惠)가 태어난다. 출산 이후 정신질환증세가 악화되어 1946년부터 덕혜옹주는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1955년에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한다. 1956년에 딸 마사에는 남 알프스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 후 임시정부인사들의 귀국에 협조하지 않았듯이 정부수립 이후에도 조선왕가 인물들의 귀국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홀몸의 ‘덕혜옹주’의 귀국까지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김을한 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여론화시킨다. 1961년 가을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 도쿄에 들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영친왕비 이방자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한다. 1962년 덕혜옹주는 영친왕과 영구귀국을 한다. 1967년 남편 소 다케유키가 찾아오지만 관계자들이 상면을 반대해 소 다케유키는 돌아가고 만다. 1989년 ‘덕혜옹주’는 창덕궁 수강재에서 쓸쓸히 운명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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