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단 신시의 <오로라를 위하여>는 극작가로서 또한 연출가로서 독특한 자기 개성을 갖고 있는 김상렬(金相烈)의 작품이라서 대본의 허점도 상연에서 또 다른 이채를 띠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낳게 한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다면 김상렬의 세계가 지닌 ‘축제의 난장판’이 정리되어 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나 현실생활을 축제판으로 흐트러 놓고 무질서의 카오스 상태에서 역사와 현실생활을 되짚어 나가던 작가의 기법이<오로라를 위하여>에서는 다분히 ‘리얼리스틱’한 감상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오로라는 주인공이 찾는 하나의 깃발이다. 그것은 그의 꿈일 수도 있고 이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꿈과 이념은 작가의 꿈이자 이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정동환이 분장한 주인공 오유석은 작가 김상열이 체미 중에 결실을 맺게 된 인물 유형이자 그를 통해 작가의 꿈이나 이념 혹은 현실비판이나 좌절이 점철되는 하나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오유석은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실패한 전형적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에서의 신분적 하강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그가 생업에 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그는 반정부운동·민주화 시위의 선봉에 선다. 6·29선언이 나오고 공격의 대상을 잃은 이른바 운동가들은 현실정치로 돌아오거나 보이지 않는 꿈(이념)을 좇는 오로라족(族)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생활력이 강한 부인으로부터 미국식으로 이혼당하고 꿈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데 여기서 김상렬 특유의 축제판이 그 여진을 보이기도 한다. 사건 진행은 회상식으로 전개된다. ‘나(김갑수)’라는 사람이 알래스카 얼음판에서 조난한 친구 오유석의 죽음을 점검한다. 왜 하필이면 그가 북극으로 날아와 죽게 되었는가. 그의 죽음의 원인은 현실에서 좌절한 꿈을 재현시키는 찬란한 오로라를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잡히지 않는 것을 찾아나선 삶의 끝은 과거의 탯줄로 묶여 운신할 수가 없다. 임종 무렵에 회상되는 장면들은 모두 지나치게 주인공에게로 기울어진 작가의 동정으로 센티멘탈해진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에의 미화이며, 그 과거 회향은 곧 자연찬미거나 소년기 혹은 고향에의 회귀로 나타나 일찍이 작가, 혹은 연출가로서의 김상렬이 보여주지 않던 세계를 그려낸다.
따라서 <오로라를 위하여>는 김상렬의 작가세계와 연출세계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 정조는 정리되어 있지 않다. 너무 잡다한 요소들이 작품 속에서 소리를 내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큼 통일된 주제로 응집되지 못한 여러 갈래의 이야기 소재들이 자기 빛깔을 고집하기 때문에 작가의 개인적 감상주의가 보편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흔한 주제인 꿈과 현실의 갈등, 그리고 그 꿈을 좇는 작가의식이 주인공 오유석을 통해 과거로, 고향으로, 소년기로, 이민간 중년기로 펼쳐지면서 채 정리되지 못한 한갓 이야기 소재로 끝나 버린 것은 이 작품이 작가 속에서 더 성숙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미정리의 편린은 죽은 곰의 처리, 권총이 놓인 자리 등 단순한 끝매김조차 되어 있지 않은 연출에서도 엿보인다.

과거의 빛과 오로라- 김상열
한 사람에게 있어 지나간 시간을 우리는 「과거」라고 정의한다. 경우에 따라서 「옛날」이라고도 하고 「추억」이라고 하는 추상명사를 쓴다. 「과거」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지고 그래서 파스텔 색깔로 희석되어 하나의 詩를 형성한다.「과거의 詩」는 아름다운 회상의 과정을 거쳐 당사자에게 위안도 되며 때로는 현재를 억압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과거 속의 나는 이중구조를 이루며 한 인격 안에서 상호갈등의 요소로 착용한다. 모든 사람에게 「과거」가 있듯이 「그 사람」의 과거는 현재의 「그 사람」의 인생을 조종하는 하나의 끈이 되며 때로는 속박하고 때로는 자유롭게도 하며 그래서 현재의 「그」를 무단 하게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詩」는 고통스런 것과 부끄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들로 합성되어 현재의 우리 내면 속에서 잠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詩」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의 삶 속에서는 「과거의 詩」는 연약하고 무기력하여 단지 「추억」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이 먹은 세대가 예외 없이 젊은 세대를 나무라고 한숨짓는 것도 「과거의 詩」가 현실의 비정함과의 상충에서 오는 패배를 의미하기도 한다. 추억은 탐미적 취향을 갖는다. 고통스러웠던 과거까지 원색은 무디어지고 파스텔 색채로서 아름답게 몽환이 되기 때문이다. 토마스만은 그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탐미적 심취자 앗센바하를 통해 그의 詩적 세계가 흑사병으로 몰락함을 보여주고 있다. 81년 정월에 우리는 십 년만에 뉴욕에서 만났다. 그가 유신정권시절 극렬하게 워싱턴을 중심으로 반 독재 투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이 들었고 그래서 국내의 수사기관으로부터 지목을 받고 있는 위험인물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르네상스 음악실에서 함께 모차르트를 듣고 은성 술집에서 녹두전에 막걸리 나누며 그저 평범하게 살았던 그가 무슨 연유로 그토록 극렬한 투사로 변하게 됐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당시의 먹구름이 끼었던 정치상황으로서는 단 일년의 연극연수자가 그와 접촉했다는 자체가 귀국 후 문제의 소지가 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죽마고우와 십 년만의 해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우리가 케네디 공항의 대합실에서 만나 긴 포옹을 한 때가 광주사태의 바로 이듬해였다. 그는 생업을 아내에게 맡기고 인권운동에 전념하였고 워싱턴 정가의 유명인사들과 교분을 가졌으며 특히 케네디 의원이나 재시잭슨 목사 등과 연대하여 한국군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반독재 투쟁에 대한 신념이나 논리가 확고하였고 그의 정치적 견해는 언제나 나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근 일년간 그의 극렬한 투쟁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점차 그가 내면 깊숙이 감추고 있는 아니 어쩔 수 없이 비쳐지는 아주 특이한 현상을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가 처연하게 살아왔던 「과거의 詩」에 대한 연민과 그것에 대한 끈질긴 향수가 그로 하여금 극렬 투사가 되게 하였다는 사실이었다. 독재자들에게 짓밟히는 것은 정치사회현상만 아니라 그가 「과거의 詩」로서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한국적 정서들이 모멸 받고 있다는 근원적인 분노였던 것이다. 간혹 낚시를 함께 가서는 그는 옛 고향의 이발소 풍경하며 기차 통학하던 시절의 정경, 때로는 눈 맞으며 술에 취해 시발택시 꽁무니에 매달려 미끄럼 타던 가난한 시절의 얘길 끝도 한도 없이 지껄여댔다. 그는 독재자를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고향의 정서를 사랑했던 것이다. 일년 후 우리는 그가 살고 있던 볼티모어 기차역에서 또 다시 긴 포옹으로 작별을 하였다.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가 덜커덩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출입구에 서 있던 나를 향해 그는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나 만났다고 너 혹시 끌려가면 주미대사관 쳐들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겁내지마!」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 친구와의 마지막 인사말이 이게 무엇인가....? 뉴욕으로 가는 긴 시간동안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깬 우리들의 머리맡에 「민주화」의 선물상자가 놓여졌다. 워싱턴에서의 그의 조직은 유명무실해졌고 생업에 등한히 했던 이십 년간의 그의 투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무기력한 중년 남자가 되 버린다. 그는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두 자식과 생이별을 감수한다. 평범한 미국시민으로 돌아가기엔 그는 아무 준비도 되 있지가 않다. 그가 한 가닥 위안을 삼았던 「과거의 詩」는 이십 년만의 귀국과 동시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모차르트를 듣고 은성에서 술 마시던 친구들은 모두 오십의 중년이 되어 세상살이에 바쁜 보통가장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향은 현대화가 되었고 옛날의 정서들은 아귀다툼 속에 묻혀버렸다.
그가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민주화는 작금의 정치형태로 봐선 분명 그런 것이 아니란 걸 확인하면서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십년간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에게 아무 것도 위안을 줄 수 없는 나로서는 이 부끄러운 연극 한 편으로서 그의 마지막 퇴로를 막고자 한다. 분명 그의 끔찍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알래스카의 죽음을 우정의 방벽으로서 미리 내세워 그의 퇴로를 차단코자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연습 막바지에 그는 한국을 떠났다. 런던이라고는 했지만 알 수가 없다. 부디 우리의 공연장에 그가 나타나길 바란다. 과거의 詩라는 오로라는 이제 우리들의 연극 속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1992년 프로그램 글 중에서-

<작품 줄거리>
북위 70도 동경160도 알래스카의 최북단. 지구의 첫 마을이라고 불리 우는 원주민촌 베러(Barrow)근방에 한대의 경비행기가 난기류에 휘말려 불시착한다. 그리고 3일 후 현지경찰과 앵커리지 주재 한국영사관 직원, 그리고 ‘나’는 급보에 접하고 현장에 도착하나 이미 오유석은 싸늘한 얼음 미이라로 발견된다. 오유석의 친구인 ‘나’는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오유석의 유품 속에서 그의 마지막 심경을 메모한 수첩을 발견하다. 오유석은 1970년대 초에 미국에 부인과 함께 이민을 떠난다. 이민 직후부터 급변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 혐오을 느끼기 시작한 그는 반체제 운동에 가담한다. 이국에서의 생존을 걱정하는 부인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능적인 인권에 대한 갈망으로 맹렬히 조직을 구성하고 모금운동을 주도하며 워싱턴 일각의 인권운동단체 결성에 성공한다. 오유석의 정치적인 투쟁의 이면 즉 그의 내면 속에서는 끊을 수 없는 고향과 조국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며 그의 추억 속에 잠재된 고귀한 시적 세계를 파괴하는 현실의 독재자들과의 투쟁으로서 그것들을 보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여름밤 개구리소리, 명동의 은성 술집, 종로의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 그리고 가난한 시절의 친구들과 술취 해 배회하던 송년의 밤거리들이 그를 외형적인 투사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백악관 앞에서의 시위로 그의 이름은 교포사회에서는 철저한 반체제 투사로 인식되어진다. 6.29선언이후 국내의 정치상황은 소위 허울좋은 민주화로 내닫고 미국에서 인권운동에 헌신했던 동지들은 정치적 야심을 품고 귀국하여 정치현장에 뛰어들어 과거의 투쟁을 상품화시킨다. 조국의 외형적 민주화는 오유석을 한순간에 무력하게 만든다. 위싱턴의 인권조직도 와해되고 더불어 오유석은 무능한 교포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한다.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강요당하고 두 자녀와도 별거를 선언 당한 오유석은 허탈한 심정으로 20년만에 귀국을 하나 조국의 정치현실은 치졸한 작태로 일관함을 발견한다. 오유석은 어느 날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린 호스테스와 함께 터무니없는 오로라여행을 알래스카로 떠나게 된다. 오로라는 그에게 있어 조국의 고향에서조차 실종된 과거의 시적 잔영으로 대치된 것이다. 오유석이 툰드라지대의 얼음 벌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북극의 하늘에 오색 찬연한 오로라가 나타나고 북극의 순록들이 빙야를 질주하는 대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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