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상사는 지리산 작전훈련에 참가했다가 잠시 일요일 외출을 얻어 사병 수명을 데리고 남원에 있는 사적지를 돌아본다. 고 상사는 사전에 "만인의총"의 안내를 부탁해 두었던 그 지방의 유지이며 자기의 백부인 고 면장으로부터 "만인의총"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임진왜란의 7년 대전이 그 막바지에 이른 정유년 (1597년) 8월, 전라도의 남원성에 얽힌 이야기로 남원성은 하3도 (전라, 경상, 충청)의 전략적 요충지로써 남원성이 함락되면 전주, 공주, 부여가 위태로우며, 이어 수원과 용인, 마침내는 수도인 한양이 또 다시 왜적에게 유린당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형국이었다. 이에 남원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민. 관. 군 1만여 명이 혼연일체가 되어 10배가 넘는 왜군을 맞아 밤낮없이 5일 동안 불굴의 투혼과 빛나는 향토애 그리고 투철한 적개심으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결국은 남원성은 중과부적으로 함락은 되었으나 민. 관. 군 1만 명령의 장렬한 산화는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의 선열들로서 애국애족의 화신이요, 영원히 잠들지 않는 호국영령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조상들의 생생한 투혼을 극화하여 재조명해 봄으로써 민족의 연면성과 국가의 정통성, 그리고 찬란한 슬기와 민족혼을 되새겨 볼 수 있게 된다.
만인의총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하고 있는 무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이다. 사적 제272호. 왜군은 임진왜란 때의 패배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597년(선조 30) 7월말 왜군 11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누어서 우군은 황석산성 (黃石山城),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즉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李福男)과 광양현감 이원춘 (李元春), 조방장 김경로(金敬老)의 군사와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거느리는 3,000명의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가 남원 지역에 나타났고, 13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에 집결해 남원성을 포위하였다. 성의 동문에는 양원, 남문은 천총 장표(蔣表), 서문은 모승선(毛承先), 북문은 이복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4·15일 이틀 동안 혈전이 전개되어 군○관○민이 합심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명나라의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정기원(鄭期遠, 접반사)·이복남·오응정(吳應井, 방어사)·김경로·신호(申灝, 별장)·임현(任鉉, 부사)·이덕회(李德懷, 통판)·이원춘·마응방(馬應房, 진안현감) 등이 전사했으며, 원군으로 왔던 명군의 이신방(李新芳)·장표·모승선 등도 전사하였다. 이밖에 성을 방어하던 2000명의 병사와 1만여 명의 주민들도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순절한 8충신과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는 한편, 1612년(광해군 4)에는 충렬사 (忠烈祠)를 건립해 8충신을 제향하였다.
원래는 남원역 부근에 있던 것을 1964년에 약 1만 2,500㎡ 넓이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971년에 보수 및 단청을 하였다. 1973년에도 정화 작업을 하고, 이듬해부터 분(墳) 1기(基)와 관리인 집 2동(棟)을 건립, 성역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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