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프랑수아 탕기 '리체르카레'

clint 2026. 6. 11. 14:35

 

 

<리체르카레(Ricercar)>
무대는 껌껌하다. 테이블과 의자가 엉켜있고, 배우들은 널빤지를 나른다. 
가로 세로의 수많은 선들이 교차하며 다양한 각 도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프레임을 
만들어내, 특별한 세트도 없이 무대에 생겨난 원근감이 낯설다. 누군가는 낡은 수트를 
누군가는 고풍스런 의상을 입고 어울리지도 않는 새하얀 분장을 했다. 아래쪽에서 
솟아오르고, 뒤에서 튀어나오고, 가림막에 숨으면서 무대를 종횡무진 하는 것은 비단 
배우들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겹쳐지는 조명에 그들의 그림자는 유령처럼 서로를 
따라다니며 무대를 배회한다. 어딘가 세밀하게 엮어진 끈을 놓쳐버리면 길을 잃고야 말 
것 같은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하나의 세계와 다른 하나의 세계가 깨지는 곳에서 
음악의 가교가 끊기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조우하게 될 또 다른 세계가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리체르카레>, 결코 그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프랑수아 탕기의 시(詩)의 샘이 열리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정형화되지 않은 동선으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주되고 반복되는 선율을 연주한다. 의자와 테이블, 여러 크기의 
판자 등의 오브제들은 종종 위태롭게 겹쳐지고, 뒤엉켰다가 풀리기를 반복한다. 
단단한 나무 문과 판자는 무대를 가로지르면서 공간을 확장하고 관객의 시야를 넓히며 
소실점을 지연시킨다. 극단적으로 유연한 탕기의 창조력은 가로지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음악적 용어 ‘리체르카레’를 만나면서 감각적이고 격조 높은 미적 실험에 
돌입하게 된다. 얽히고 설킨 형상들, 그리고 거칠게 던져지는 명암,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홀연히 나타나는 목소리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문장과 단어들은 무한한 
공명을 만들어낸다.

 



'리체르카레'는 본래 16~17세기에 유행한, 하나 이상의 주제가 선율 모방을 통하여 발전해 나가는 기악곡을 일컫는다. 이 음악적 형식은 필연적으로 어떤 주제적 연관이 없는 다른 에피소드를 연결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공연의 제목이 '리체르카레' 라고 했을 때 그 안에 담긴 과감한 실험성을 추측할 만도 하다. 실제로 이 공연에서는 역사와 시, 카바레, 코러스, 예술, 건축 등 모든 것들이 연상된다. 공연에는 프랑수아 비용, 단테, 피란델로, 카프카, 만델스탐의 텍스트가 인용되고, 리스트, 베리오, 베르그, 베르디, 스트라빈스키, 베토벤의 음악이 흐른다. 이러한 무대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부유하는 시간 속에, 끊임없는 분열이 감각을 자극하지만 대체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확인할 방법조차 없다. 연출가 프랑수아 탕기와라도 극단은 공연이 올라가기 이전에 관객들에게 그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공연을 감상하는데 자막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하니, 그들이 공연에서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듯 모를 듯하다. 다만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 위에 제한된 객석이 들어온다는 정보만으로, 이 공연이 상당히 농밀하고 압축된 분위기에서 진행되리란 것을 어렴풋이 추측해볼 수밖에. 공연의 제목인 '리체르카레'는 의미상 서로 다른 여러 재료로부터 얻은 다양한 것들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당기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공연은 그러한 각각의 요소가 아닌, 그 단어 자체에 내포된 '환경'이라는 의미에 더 집중한다고 한다. 별개의 부분들은 분명 분리될 수 없지만 부분들이 축적되어 만들어낸 총체가 바로 <리체르카레>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순간, <리체르카레>가 무대에서 자기 스스로를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공연에서 연출가 방기의 역할은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들로 관객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프랑수아 탕기(François Tanguy)와 라도 극단(Théâtre du Radeau) -뗏목을 타고 연극의 바다를 탐험하는 오케스트라
연출가 프랑수아 당기는 1982년부터 라도 극단과 함께 작업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이미 탕기와 라도 극단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평이 나온 지 오래인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극단을 벗어난 작업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공동작업에 익숙하다는 얘기일 텐데, 덕분에 그들의 모든 작품들은 오랜 연구와 탐구를 통해 완성된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이 지난 세월동안 발표한 작품은 채 10개도 되지 않는다.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2~3년의 시간이 걸리고 그렇게 인내의 시간을 견딘 작품들은 그만큼 빛을 발한다. 특히나 그들 극단은 종종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에 비유되곤 하는데, 각각의 솔로가 유지되면서 전체적인 앙상블에 개방된 이들의 작업방식은 공연예술의 특성을 극대 화된 형태로 발현시킨다. 보통 이러한 공동작업은 창작 과정 자체에서 작업자들이 얻어가는 것이 많은 반면에 관객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기 마련인데, 3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들이 축적해 온 팀워크는 이제 관객들을 완벽히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프랑스에는 극단 창단 이래 현재까지 탕기와 라도 극단을 꾸준히 지켜보는 서포터즈가 있다.

 

 


1977년 르망에서 창단된 이 극단의 이름인 'Radeau'는 프랑스어로 복을 뜻한다. 탕기는 연극이 과연 무엇을 열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인습적인 생각은 바다 위에 표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구멍 뗏목과도 같다'고 얘기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 주장하며 작업을 통해 정신적인 위안이나 안정성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향해 쉬임 없이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옆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생각해보라. 바다에 떠있는 뗏목 하나가 얼마나 천천히 움직이는지, 그리고 얼마나 흔들거리며 파도와 맞서는지, 그리고 얼마나 으스러지기 쉬운 약한 존재인지. 그들이 창작과정에서 테스트와 음악, 계속되는 즉흥에 몰두하는 이유도 정형화된 무엇인가를 재생산해내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라도 극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작업 과정과 결과물 모두에서 컨템포러리 씨어터에서의 극작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연구가 연극의 고고학이나 인류학적 접근이 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예술이란 것이 연극이란 것이 얼마나 일시적인 것이고 덧없을 수 있는지, 그 본질적이고 태생적인 가치이자 한계를 동시에 고민한다. 라도 극단은 이 모든 작업의 효율성과 특수성을 감안해 1992년 르노 자동차의 공장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 해 라퐁드리(la Fonderie)'라는 작업 공간을 만들었으며, 1997년부터는 공연에 텐트를 사용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