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빅토르 위고 '천 프랑의 보상'

clint 2025. 12. 20. 04:41

 

 

1820년대 파리의 어느 겨울, 주인공 글라피외는 작은 실수 때문에 도둑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한 뒤 새로운 삶을 위해 파리에 온다. 하지만 또 다시 오해를 받고

경찰에게 쫓기던 중 젊은 여인 시프리엔의 집에 몸을 숨기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 에티에네트와 병들고 몰락한 할아버지 제두아르와 함께 살고 있다. 

이때 드 푸엔카랄 남작의 금융투자 대리인 루슬린이 들이닥쳐 4천 프랑의 빚을 진

제두아르의 집기들을 압류하려고 한다. 하지만 흑심을 품은 루슬린은 딸 시프리엔과

결혼하게 해주면 압류를 풀어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때마침 시프리엔의 연인인

에드가르가 은행에 입금하려던 회사 돈으로 대납하며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 돈을 메우기 위해 도박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에드가르는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시도를 한다. 물에 빠진 그를 구해오면 돈을 주겠다는 드 퐁트렘의 제안에

글라피외는 강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내고, 스스로 비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보상금을 이 불행한 가족을 돕기 위해 쓴다. 결국 글라피외의 노력으로 에티에네트는

헤어진 연인이었던 드 푸엔카랄 남작과 재회하고 시프리엔과 에드가르는 맺어진다.

 

 

 

<천 프랑의 보상>은 빅토르 위고 희곡. 위고가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Guernsey Island)에 망명해있을 무렵 <레미제라블>을 완성한 후 4년 뒤인 1866년에 집필한 것으로, 그의 소설의 주요 테마인 사회적 숙명을 다시 한번 다루고 있다. 작품이 완성되자 오랜 공백을 깨고 나온 위고의 극작품이었기에 파리의 극단들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레미제라블>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희곡이지만 소설인 <레미제라블>과 겹치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경찰청장으로 묘사된 들라보 경감과 같이 몇몇 실존 인물에 대한 언급도 동일하거니와, 정치사회적 배경이나 주제의 측면에서도 유사점을 지닌다. 정치적 탄압,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횡포가 극심하던 1860년 대에 씌어진 이 작품을 통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처럼 사회의 부정과 인간 불평등을 고발하고 서민들의 연대를 주장한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제목은 500 프랑의 보상 이었다고 한다. ‘천 프랑의 보상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이 완성되자 오랜 공백을 깨고 나온 위고의 극작품이었기에 파리의 극단들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원고여백에 1막의 복잡한 무대 구성을 세 번에 걸쳐 스케치하고, 원고를 마친 후에도 한 달 동안 수정작업을 한 점으로 보아 상연을 목적으로 집필한 게 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검열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공연하겠다는 위고의 뜻에 따라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당시 라 포르트 생-마르탱 극장대표의 공연제안에 대한 답신에 그의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다.

제가 이번 겨울에 쓴 이 희곡이 상연되려면 프랑스에서 자유 보장을 위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합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상연을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희곡은 공연을 위해 씌어졌고, 무대연극의 관점에 맞춰 완전히 각색된 작품입니다. 예술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상연될 수 있겠지만, 검열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돌아오는 날 제 희곡을 세상에 내놓겠습니다.“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파리의 대극장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무대에 다시 올리기 시작한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이 작품의 상연만큼은 거부했다. 1886 '자유연극집'이 나올 때도 이 작품만 포함되어 있지 않다가 1934년에야 출간되었고, 1961년 메츠 시립극장에서 위베르지누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위고의 <천 프랑의 보상>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자기검열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이 작품이 씌어진 1860년대의 프랑스는, 크림전쟁을 겪고 영국과 첫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하면서 교역과 금융 산업이 발달하고, 오스만(G.-E. Haussmann)의 주도 아래 대규모의 파리 도시 정비사업이 진행되던 때이다. 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 침략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폴레옹3세가 쿠데타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앉자 공화파 지식인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표현의 자유는 탄압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결국 1867년에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3세가 항복하자 의회는 바로 공화국을 선포한다. 정치적 탄압,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횡포가 극심하던 1860년대에 씌어진 이 작품을 통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처럼 사회의 부정과 인간 불평등을 고발하고 서민들의 연대를 주장한다.

 

 

 

빅토르 위고는 그의 비극적인 다른 작품과 달리, 여기에서는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사회 참여극 모델을 보여준다. 즉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불의와 금권만능주의에 저항하도록 동시대 시민들을 끌어들이는데 우화와 해학을 사용한다. 2막에서 두드러진 사육제 극작법을 통해 부르주아들의 편견과정의의 실종을 비판한 것이 그예이다. 멜로드라마식 구조도 극중 해학적 요소에 한몫을 하는데, 출생의 비밀, 미혼모, 자신보다 젊은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악역의 등장 등의 과장된 상황은 당시 관객들에게도 웃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중간중간 삽입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결정론에 대한 글라피외의 독백은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전체적으로 동시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야기 속에 달콤함과 씁쓸함,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기묘하게 섞여 있는 산문체 희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현재 우리의 시대를 대치해보게 된다. 고전은 시대를 관통한다. 21세기, 우리는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제두아르 대대장이 부르짖던,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품에 안기고 여성이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 도래하였는가. 경제 파시즘, 불평등의 가속화, 헌법에 엄연히 보장되었음에도 위협받고 있는 노동권, 집회와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무시되는 약자의 인권 등등.

 

 

 

 

한권의 역사 책보다더 생생하게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의 편에 선 문학의 힘이다. 위고와 동시대 작가였던 스탕달은 <적과 흑>에서 소설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이라했다. 위고는 종교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정의가 구현되는 은총과 같은 순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천 프랑의 보상> 2010년 프랑스에서 툴루즈 국립극장 예술감독 로랑 펠리(Laurent Pelly)의 연출로 무대에 올려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이 씌어진 지 150여년이 지난 후에 다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연극이란 마땅히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함을 표명하는 것이라고 한 연출가의 기획의도처럼, 작품이 전하는 중요메시지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하고 정치적 미학적 처리를 함으로써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백지 위에 선을 그리듯 공간을 윤곽선으로 처리해, 선이 주는 생동감, 건조함, 단순함 등을 강조한 무대디자인은, 굶주린 위장처럼 텅 빈 집을 가진 가난한 민중의 비참함을 은유한다. 극중 인물들은 독백을 하다가 무용가처럼 공간을 유영하치도 한다. 펠리는 고전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요소를 최대한 극화해 연출하였고, 문학과 사회, 역사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 툴루즈국립극장 오리지널팀이 2014년 10월 성남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으로 올려졌다. ​프랑스어로 공연하고 배우들의 대사가 스크린 자막에

올려졌고 2시간 반의 공연시간이다. 이 공연팀이 2011년에 '프랑스 비평가상'에서

연출가상과 무대미술상을 수상했던 그 팀이다. 연출은 로랑 펠리이다
망명생활을 하던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완성하고 4년 뒤인 1866년에 쓴 이 작품은 

'레 미제라블'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횡포와 사회적 연대에 관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당시에는 검열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공연하겠다는 위고의 뜻에 따라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1961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관객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