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 입장을 취한 오펜하이머는
이후 매카시 선동이 불던 때 위험인물로 지목당하고,
1954년 4월 12일부터 약 3주간 그의 충성심과 신뢰도를
따져 묻는 청문회가 열린다. 그곳에서 그의 사적인 관계와
과학 기술에 대한 주관적 견해까지도 낱낱이 해부되고 그는 파멸한다.
그 배경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미국은 소련에서 수소폭탄을 개발한다는 구실로
과학자에게 수소폭탄 개발의 임무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거부한다. 권력자들은 여론을 내세워 그를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법정에 서게 한다. 매카시 선풍이다.

키파르트의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핵물리학자를 다루고 있지만. 그 배후에
냉전시대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역사적으로 실재한 기록이라는
사실성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그렇긴 해도 원래의 자료를 압축 분류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품은 의도와 취사선택의 솜씨도 크게 뒷받침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 극은 1964년 1월에 TV극으로 방영되었고. 같은 해 10월 베를린과 뮌헨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1964년이라면 오펜하이머 사건이 있은 지 10년. 또 오펜하이머가
복권된 이듬해이다.

키파르트가 이 작품을 다룰 때의 서독 정치상황은 이에 대한 답을 쉽게 준다.
때는 아데나워가 50년에 펼쳤던 뿌리 깊은 냉전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시기.
갓 동독에서 건너온 작가인 키파르트가 아직도 짓누르고 있는 서독의 군국적
반공주의를 체험하면서. 냉전논리의 뿌리인 매카시즘을 겨냥케 된 심리과정은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런 배경이 그것도 사건 무대였던 미국이 아닌
서독에서 무대에 올려진 이유일 것이다.
작품 내용과 사실관계의 일치 여부를 둘러싸고 1964년~1966년에 걸쳐
물리학자와 작가의 공방 과정을 통해 편지와 전화가 오갔으며
1966년 키프하르트가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자신의 작업은 기록 자료의 몽타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에 가능한 한
밀접하게 일치하기를 바라면서도 독자적 목적을 갖는 연구 작품이다.
그리고 역사적 재구성과 다르며 소재를 하루 저녁 공연물이 되도록 집약해야 하기
때문에 변경은 불가피하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기를 소망하지만
소재 속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끌어낼 수 없다'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 사건’ 을 낳은 매카시즘이란 대체 무엇인가?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미국의 정가는 근 20년 만에 보수파 공화당의 승리로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공화당 출신 트루먼 대통령은. 불과 2년 전까지도 히틀러와 히로히토에게 겨누었던 공격의 화살을 스탈린에게 돌리면서 ''공산주의 타도!”를 정치구호 제 1성으로 삼았다. 그 후 55년에 이르기까지 반 미행위자의 색출작업이 극성스럽게 벌어졌다. 미국 국기에의 충정 여부를 선별하는 이른바 충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의장으로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 원 매카시가 앉았다. 이 위원회가 만든 용공 여부 선별 필터에는 250만 명의 정부관리, 3백만 명의 군인. 3백만 명의 국방 관계 요원이 거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과 연루된 가족까지 합산한다면, 2천만이 넘는 미국시민이 언제라도 이 필터에 걸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가히 그 긴장과 공포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 다. 속칭 '마녀사냥‘으로 불려 진 이 히스테릭한 조사 절차의 첫 케이스로는 아이슬러 가문의 형제들이 걸려들어 세계적 주곡을 받았다. 그 가족의 일원으로 훗날 브레히트와 『갈릴레이 생애』 세 번째 판 무대작업을 한 작곡가 H. 아이슬러의 진술 내용은. 그때 상황을 십분 유추하게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위원회가 나 하나의 개인을 박해함으로써 미국 내의 다른 많은 예술가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이 위원회는 진보적으로,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예술가를 겨누어 출정하여 그들의 예술작업을 히스테릭한 정치적 심사 대상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건 헌법에도 위배되는 일입니다. (…) 이런 짓거리는 이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자행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 이 위원회도 그럴 겁니다. 수많은 낯익은 이름들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형제, C.채플린, A.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리스, 꼭도 등)이 H. 아이슬러를 변호하며 나섰다. 그러나 결국 토마스 만과 채플린도 1950년에 이 위원회의 수사 대상에 올라 스위스로 이주했다. 아이슬러에 대한 해결은 기술적인 추방'. 즉 '자발적인' 퇴거였다. 1948년 에 뉴욕을 떠나면서 아이슬러는 자신이 두 차례나 파시스트들에 의해 추방되었다고. 히틀러와 메카시즘을 동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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