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중의 어느 절....
겨울 안거 동안 허운, 돈조, 혜산 세 스님은 함께 생활한다.
아직은 여물지 않았지만 만만치 않은 뚝심을 보이는 돈조스님.
늦깎이로 입문하였지만 구도의 치열함으로 선방에서는 물론 지대방에서조차
긴장을 늦추지 않는 혜산스님. 외길을 살면서도 넉넉하고 여유로운 허운스님.
깨달음을 위해 자신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선방! 그짬을 잠시 이용하여
스스로 마음을 잡는 지대방! 두 방을 오가는 스님들의 삶 또한
그들의 마음 씀씀이만큼 절묘하다.
빨랫감을 두고 아웅다웅하고 안거 해제 후의 계획을 말하며 티격태격하고
심지어 안거 해제 기념 파티를 위해 솔차를 훔치려는 소동도 일으키며......
이런 때에 무문관에 들어가 6년 결사를 하던 무문관의 신화 도문스님이
스스로 결사를 풀고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청천벽력같은 일이다.
소란스러워진 절집에 도문스님을 흠모한다는 객승 우지스님이 찾아와
한바탕 헤프닝을 벌인다. 이윽고 도문스님이 나오기로 한 날,
수많은 대중들을 남겨둔 채 도문스님이 잠적한다.
무문관의 신화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저마다의 불평이 자자하다.
크게 발심한 혜산스님은 스스로 무문관에 들어가고
우지스님은 도문스님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모두 떠난 밤, 허운스님과 돈조스님이 솔차를 두고 마주앉는다.
똑똑똑, 지대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일까?
손님은 도문스님이었다.

연극 ‘지대방’은 극단 완자무늬가 조계종 총무부장 원담 스님(현 수국사 주지)이 2006년 쓴 작품을 원작으로 김태수가 연출한 작품이다. 2007년 초연 이후 서울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2010년 5월 다시 무대에 올렸다.
스님들이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기간을 안거라 하며, 이는 여름 3개월 동안 행하는 하안거(夏安居)와 겨울 3개월 동안 행하는 동안거(冬安居)가 있다. 즉 스님들은 1년에 두 번 안거를 행하게 된다. 치열하게 수행하는 선방 옆에는 지대방이 있다. 지대방은 수행 틈틈이 쉬는 휴게실과 같은 곳이다.

4인 스님들의 좌충우돌 참선기를 관람하며 우리네 치열한 삶의 터전 속에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자기만의 지대방을 찾다 보면, 일상 속에 숨어있는 찬란한 순간들이 섬광처럼 빛나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극의 중심에는 세 명의 수좌 스님이 있다. 구참수좌 허운과 늦깎이 출가자인 혜산, 지대방의 막내수좌 돈조, 이렇게 세 명의 수좌가 지대방에 방부를 들였다. 중심은 세 수좌이지만 두 명의 수좌가 더 등장한다. 문경에서 온 터미네이터 같은 우지, 얼굴 없는 6년 무문관의 신화 도문. 이들은 모두 도반이다.
구참수좌 허운은 오랜 수행길에 깨달음과는 거리 있어 보이지만, 외길을 걸으면서 넉넉하고 여유롭다. 혜산 수좌의 치열함에 고개 끄덕이면서도 몰아붙이지 않는다. 건강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는 허운의 모습은 깨달음의 길이 단기전이 아님을 드러낸다. 지루하고 답답한 깨달음의 과정에서 혜산은 지치지만, 지칠수록 자신과 더욱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구도행에서 혜산은 수행자의 길을 보이려 애쓴다. 까불이 돈조는 늦잠 자 참선시간에 지각하고, 선방에서 졸다 허운에게 뒷통수 맞기 일쑤인 얼치기 수좌 같지만 심성이 곱고 뚝심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치열한 수행과 본성적 욕망의 경계에선 쑥스러워 한다. 동안거 해제를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파티를 열기 위해 산내 비구니 암자에 몰래 들어 ‘솔차’를 훔쳐내오지만 ‘간장 단지’인 것을 안 순간,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오다 홍콩의 한 호텔방에서 ‘야동’을 보고 다음날 계산대에서 추가요금을 물어야 했던 사실이 폭로되는 모습에서는 사뭇 진지할 것만 같은 수행자들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허운, 혜산, 돈조 모두가 똑같다.

극 ‘지대방’의 이야기 중심에는 ‘무문관의 신화’가 자리 잡았다. 6년 결사를 외치며 무문관에 들어간 도문 수좌의 해제 소식에 ‘지대방’ 대중은 신화의 주인공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혜산은 도문의 뒤를 이어 무문관행을 고민하는 긴장된 순간에 봉암사 수좌 우지가 집채만 한 바랑을 메고 등장한다. 대중들은 도문의 무문관 해제를 기념하는 법단을 마련하지만, 어디에도 도문은 보이지 않는다. 도문 수좌는 어디로 갔을까? 혜산은 무문관에 뛰어들어 도문을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돈조는 도문이 도망갔을 것이라며 배신감에 흥분하고, 혜산은 무문관의 전설은 깨어져서는 안된다며 무문관행을 강행한다. 도문을 흠모하는 우지 역시 무문관에는 자기가 들어가야 하는 데 혜산의 앞섬에 한발 늦었다며 통곡하고, 허운은 고개만 끄덕인다. 극의 긴장을 도문의 실종사건이 더한다. 해제를 앞둔 실종사건은 오리무중. 도문을 향한 인물들의 비난에도 허운만 말이 없다. 혜산이 무문관으로 향하고, 돈조가 허운에게 만행 후 다시 지대방으로 오겠다는 약속한다. 1차 솔차 몰래빌려오기 작전에서 도망쳤던 허운이 홀로 허락 없이 빌려온 솔차를 돈조에게 권하는 그때 도문이 지대방에 지대러 왔다. “도문이 지대방에 방부들입니다.”
도문은 무문관을 나와 지대방으로 왔다. 원작자 원담의 말처럼 지대방은 어머니의 품 같은, 현실과 수행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그런 곳이다. 누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간섭받지 않는 여유로운 공간이지만, 깨달음의길을 가는 수행자에게는 그리 편한 곳만은 아닐 터이다. 수행과 현실의 경계에 선 지대방은 아이러니한 곳이다. 무문관은 깨달음을 좇는 수좌들의 최후 용맹처이지만 그곳에서 깨달음이 기다리지 않는다. 지대방은 긴장을 늦추며 도반에게 기대는 공간이지만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폐쇄된 무문관과 개방된 지대방 사이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원담스님이 희곡작가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한국불교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10. 27 법난을 소재로 한 ‘뜰 앞의 잣나무’는 지난 1996년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지대방’도 2007년 초연돼 호평을 받았으며, 서울문화재단의 공연예술 창작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돼 또 다시 공연되고 있다.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와 깊이를 평가받은 것이다.
원담스님은 세간의 화제가 됐지만 언론에 드러내기를 꺼려왔다. 수행자로서 ‘외도’한 행동이 혹여 불교계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극작가로서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교문화 발전을 바라는 작은 소망 때문이다. 집무실에서 만난 원담스님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었다.

-희곡을 쓰게 된 계기.
“20대 중반 시절에 천은사 객실에서 우연히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유명한 희곡을 보게 됐다. 내용을 살펴보니 선문답이 따로 없었다. 당시는 희한하게만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부산에서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을 처음 보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1980년대에 연극계와 인연을 맺으며 연출가 김태수. 강영걸, 배우 명계남 씨 등 연극계 중진들과도 친분을 쌓게 됐다. 그들은 불교관련 작품에 대해 자문을 구하다가 아예 내게 희곡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희곡 쓰기는 쉽지 않은 작업인데.
“권유를 받을 때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스님들이 쓰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걸리는 소설과 언어가 절제된 시의 중간 단계가 희곡이다. 구상을 마치면 두세 달 정도면 한 편을 쓸 수 있다. 이렇게 만든 것이 첫 희곡 ‘뜰 앞으로 잣나무’다. 그리고 ‘지대방’이 있다. 그 중간인 1997년에는 ‘부엉이는 황혼에 비로소 날개를 편다’를 썼다. 무대에 올리지 않아서 모를 것이다. 희곡 쓰기를 시작하며 10편을 쓰겠다고 서원했다. 지금까지 3편을 완성했으니 7편 남았다.”
-희곡을 통해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
“인간의 모습 그대로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희곡을 쓰며 인간을 선과 악이라는 구분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겼다. 세상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좋은 놈, 나쁜 놈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성격이 규정되기는 하지만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어 사랑스럽다. 나쁜 사람도 그 나름대로 사는 이유와 철학이 있다.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 내가 희곡을 쓰며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지대방’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
“선방과 지대방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출세간과 속세로 구분할 수 있다. 극 중에는 무문관이 등장하는데, 가장 성(聖)스런 장소로 출가자들의 이상향이다. 무문관에서 6년 결사를 마치고 나오게 되는 스님이 법문하겠다고 하는 날 사라진다. 이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선방 스님들은 큰 실망감에 휩싸인다. 성스럽고 이상적인 것도 좌절하게 할 수 있으며, 스님들이 정담을 나누는 속된 공간인 지대방도 그렇지 않다는 반전을 준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물든 현대인에게 던지는, 부처님의 불이(不二) 가르침이 연극의 포인트다.”
원담스님은 ‘지대방’에 대해 “뮤지컬과 코미디 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문화계에서 이 연극은 관객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한 작품은 아니다”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스님은 “한번 보면 자신이 투자한 시간에 상응하는 것들이 충분히 담겨있다”며 “연극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공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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