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유진 오닐 '다이나모'

clint 2025. 6. 27. 06:09

 

 

과학 집안인 화이브 집과 신교도 집안인 라이트 집은, 그들의 거실과 침실이

관객에게 동시에 보인다. 그들의 집은 약간의 비밀이 있는 공개된 세계이다.

루벤은 새로운 신(神)인 전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하지만 그의 "항의적인” 교육은 그로 하여금 숨겨진 신조를 요구하게 한다.

그러나 비록 새로운 신이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고 과학의 본질이 정확하고

완전한 대답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발전기는 여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루벤의 절대적인 지식에 대한 요구는 발전기의 리듬의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에 의해서만 대답이 된다. 그러나 두 얼굴로 살아가는 상태는 고통스럽다.

 루벤은, “어머니, 난 단지 어머니가 나를 숨겨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의 마지막 외침이다. 

'다이나모'는 현대 과학과 신교주의가 준 대답의 부적절성을 제시한다.

 

 

 

유진 오닐의 '다이나모'가 출판된 것은 1929년 10월이다. 그러나 그 공연은 1928년에 이미 시어터 길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후에 공연이 안 된 작품으로 보인다)

오닐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 영혼의 큰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상징적이고 사실적인 전기이다. 그것은 실제로 내가 느끼는 바대로의 오늘날의 질병 - 옛 신의 사망과 과학과 물질주의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살아남은 원시적 종교적 본능,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위로하려는 본능을 위해서 어떤 충분한 새로운 신을 주지 못하는 것 - 의 뿌리를 파내는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다. 나에게는, 오늘날 큰일을 하려고 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연극이나 소설의 모든 사소한 제목 뒤에 큰 주제를 가져야만 하는 것 같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단지 사물의 표면에 여기저기 낙서를 하고 있으며 영업장의 접대 자 이상의 실질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처럼 '다이나모'에서 오닐이 다룬 것은 상당히 난해한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의 과학 문화와 구식 종교사상의 교섭에 대해 오늘날 생각해 얻을 수 있는 해결책 중에서 아주 상상적인 것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종교를 등지고 기계신앙에 빠진 주인공 청년인 루벤이 끝내 광란과 파탄의 최후를 맞고 있다. 그것은 종교를 배신한 자에 대한 하나의 형벌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주인공의 주관에서는 그가 그 고뇌의 죽음 속에서 어느 정도 승리를 노래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것은 사도이면서도 현대 수행자의 열렬한 고행의 자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오닐은 현대의 신앙과 절망의 근원을 더욱 친밀하게 다루었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다이나모'는 공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엄청나게 성공을 거두었던 것보다 오늘날 연극이 필요로 하는 그런 성공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극작가가 20세기 초에 이러한 문제를 다뤘다는 것은 꽤 야심적인 모험으로서, '다이나모'도 하나의 문예 작품으로서는 그러한 이유에서 당연히 부족한 점을 많이 남기고 있다. 제이 브룩스 아트킨슨은 뉴욕 타임스 지상에 '다이나모'와 같은 폭넓은 보편적인 희곡은, 무한한 논쟁을 야기하여, 같은 부류에서도 뒤지지 않는 맹렬한 적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다이나모'자신이 이미 맹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현대의 기계 문명에 있어서 인간 생활의 위치에 대해서 오닐은 이미 "털북숭이 원숭이" (The Hairy Ape) 안에서 약간의 고찰을 나타냈었는데, 다시 이 작품에서 문제를 근본적인 종교 세계에 까지 파고들어 그 안에서 하나의 반응을 터득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오닐이 물질주의를 거역한 것은 성직자가 철학적 물질주의를 세련되지 못한 물질주의, 즉 도덕적 안녕보다 물질적인 행복을 선호하는 것과 혼동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러므로 오닐이 자신의 반 물질주의를 명쾌하게 하고 있는 작품인 '다이나모'가 비열하고 하찮은 인물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즉 거기에 "대지의 어머니”가 나오지만 그녀는 현명하고 비극적인 시벨이 아니라 살찌고 어리석은 화이브여사, 무신론자인 발전기 감시인의 둔감한 아내이다. 그녀는, 작품의 다른 인물들처럼, 물질주의적인 우주와, 그 자신의 힘에 대한 현대인의 감각, 둘 다의 화신인 다이나모 신과 자신을 결연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신은 아무리 그것이 처음에 프로테스탄트의 절제에 대항한 삶의 동맹자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삶의 힘을 좌절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경멸적이고 살인적이 된다. 

'다이나모'는 이 같이 그 제재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현대의 우리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희곡으로서 끊임없이 대담한 정진을 계속해 갔던 오닐의 실험 정신과 그 수준을 알기 위해서 일독을 권장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