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벚꽃동산은 19세기 러시아 배경의 원작을 1930년대 한국으로 재구성 한 것으로
원작 속 배경인 19세기 러시아는 사회적으로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였고,
이에 맞추어 문화가 활성화 되었던 시기였다.이러한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1930년대의
공통점을 찾아 새롭게 구성한 연극이 바로 ‘벚꽃동산-꼬메디 노스딸지아’다.
때는 한창 신식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 개화기, 공여사와 그녀의 딸
인혜는 일본 동경에서의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공여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소식은 안좋은 소식이었는데,
그녀의 추억이 가득한 벚꽃 동산을 철도가 지나가야 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8월 22일에 경매에 붙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노일상이란 상인이
누누이 설명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빠와 함께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 해나간다. 또한 그녀의 막내 딸인 인혜는
사회주의사상에 빠져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아무것도 실천에
옮기지도 못하고 무능력하며, 자신은 평생 대학생만 할 것이라고 철이
덜 들은 과거의 가정교사인 두변혁에게 반한다. 인혜는 사회주의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함을 보이며, 단지 그 언변술에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인혜는 한창 30년대에 단지 아무것도 모르고 허울만 좋은 계몽
지식인들에게 넘어가 잘못된 사회주의로 빠져들게 되었던 농민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렇게 매일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살던 공여사는 결국
노일상이 그 벚꽃동산을 샀다는 것을 듣게 된다.
술에 잔뜩 취한 노일상은 자신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종의 신분으로서
차마 못 들어갔었던 가장 아름다웠던 벚꽃동산을 자신이 사게 되었다며
울면서 주정부리는 부분은 그 당시 아직까지는 남아있었던 신분제의
차별이 보이지 않게 노일상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즉, 벚꽃동산을 자신이 소유하게 됨으로써 자신은 과거의 천한 신분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모두 또 다른 새로운 동산을 만들기로 하고 떠날 채비를 한다.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떠나기로 한 것이지만, 모두 쉽게 떠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추억의 목마에 앉아서 시간을 끌기도 하고,
빠진 짐이 있나 없나 꾸물거리며 확인을 한다.
모든 것이 이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차례로 짐을 가지고 떠난다.
2007 서울연극제 공식초청작인 <꼬메디 노스딸지아 - 벚꽃동산>은 임형택이 번안 연출을 맡았다.
이상향. 낯설기도 하지만, 낯익기도 한 단어이다. 이 당시에는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이 이상향, 즉 모두가 좋아하고 그곳에서 추억을 만들기를 좋아했던 익숙한 벚꽃동산이었다. 하지만, 점차 신식 문물이 들어옴에 따라서 또 다른 이상향인 다른 동산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현재의 나 또한 모두가 원하는 그러한 벚꽃동산만을 막연하게 원하는 건 아닌지, 또 다른 새로운 동산을 찾아 떠날 채비는 하지도 않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돌아본다.
체홉은 <벚꽃동산>을 “꼬메디”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국내외에서도 수없이 많은 공연이 “비극”의 성격을 갖고 공연되었다. 체홉이 희극으로 명명한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보면 삶의 비극은 서글프지만, 그 이면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상황이나 인간의 행동은 한편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벚꽃동산>의 낙천적인 옛 지주들은 자신의 영지가 경매가 팔려나가도 소풍과 파티로 소일하며 과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원작의 무대인 19세기 말, 러시아의 역사적인 격변을 떠들썩한 시골 빚잔치의 풍경 속으로 담아낸 체홉. 그는 바로 이런 점을 희극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번안, 연출의 글 - 임형택
안톤 체홉의 원작 ‘벚꽃동산’이 추상적인 소유와 구상적인 소유의 갈등,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인식과의 갈등이 빚어낸 드라마라면 이 드라마는 체홉이 살았던 러시아의 어디가 아닌 한국인의 삶의 공간에서도 발견되는 갈등의 드라마이다. 따라서 체홉의 언어가 갖고 있는 미학을 상실하지 않은 채 ‘벚꽃동산’이 갖고 있는 드라마로서의 미학을 우리 삶의 가까운 모습에서 찾으려고 했다. 또 하나는 체홉이 본래 의도하였던 바와는 달리 ‘벚꽃동산’이 사회비극으로 그려지는 그간의 오류에 대하여 체홉이 본래 의도하였던 꼬메디로서의 우리 삶의 모습을 인간의 신체언어를 통하여 드러내려고 한다. ‘벚꽃동산’의 등장인물과의 대화 및 행동에서 벌어지는 미학은 그가 말하려고 했던 주제 ‘삶의 있음과 없음’으로 압축되어 연기자들의 신체언어를 통하여 표현될 것이다. 체홉의 원래 의도했던 대로 대사는 압축적, 상징적으로 생략될 터이며 이는 연기자들의 몸짓, 소리들로 대체될 것이다.
또한 체홉이 중요하게 여겼던 환경이 끼치는 요소들, 소리, 공간 등은 사실적 재현이 아닌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공간, 소리들로 대체될 것이다. 따라서 벚꽃동산은 공여사(라네프스카야)와 안인혜(아냐), 공인하(가예프) 등의 심리에 깊숙이 드리워져 있는 상상의 산물로만 존재하며 연기의 공간은 텅 빈 무대가 된다. 이 작업은 체홉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 체홉 드라마의 본질을 보다 깊숙이 탐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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