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한현주 '개천의 용간지'

clint 2025. 4. 14. 19:05

 

 

 

고등학교의 영화동아리 필난다 학생들은 청소년영화제 출품할 작품을 정한다.

민혜는 00전자 파업과 그 이후에 대해 작업을 하자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불과 1년 전,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현재 아이들이 있는 동네이다.

그렇기에 주제에 대해 반발이 dlT다.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진행되었고 ,

필난다 학생의 가족 중에는 사건으로 인해 정리해고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현재 조용해졌다.

작품에 대해서 옥신각신 하는 사이 또 한명의 정리해고 사상자가 나온다.

필난다 학생들은 하나씩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친구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

점점 서로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 즉흥 발랄 엉뚱 생뚱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시작 하게 된다.

 

 

 

 

지극히 사소한, 그리고 지극히 절대적인 재작년, 청소년 극을 쓰면서 청소년의 뇌구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제작진은 몇 가지 실험을 진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렇다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찰흙을 주고는, 이들이 화가 날만 한 상황을 제작진이 들려주는데, 그에 대한 분노의 크기를 찰흙 덩어리로 표현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인들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찰흙 덩어리의 크기를 달리하는 반면, 청소년들은 모든 상황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예를 들면, 친구가 자신의 문자를 씹은 것에 대한 분노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누명을 쓰게 된 상화에서 느끼는 분노의 크기가 다르지 않았다. 뉴런이 마구 확장되는 시기라 분노 조절이 어려워, 사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맞다, 나도 그랬다성적에 따라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선생님을 볼 때, 오작동으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단 일 분이라도 일찍 울랄 때,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보고도 내가 나선다고 되나 싶을 때, 아프다는 핑계로 자율학습 안하고 나왔는데 시내 한복판에서 담탱님과 딱 마주쳤을 때 이 모두에서 느낀 짜증과 분노의 크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민과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수학 시간에 평소와 다른 선생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굉장히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던 분이었는데, 그날따라 영 맥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저 문제를 몇 번째 풀어 보이고 있는 걸까 물론 그 선생님을 좋아했기에 가능한 연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워 문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는 학내에서 선생님의 흡연이 가능했다.) 그 권태로움이란! 순간,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이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다른 선생님과 달리 실내화를 잘 신지 않았다. 구두를 신고 수업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자의 씁쓸함을 느꼈다. 물론 과도한 감정이입에 따른 과도한 해석이었다

 

 

 

많은 작가가 첫 부분, 첫 문장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 그러니 외국 작가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자 또한 그것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첫 부분부터 강렬한 까뮈의 이방인 같은 작품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영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주인공 뫼르소는 전혀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 불온함은 내게 그저 문학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늦게 밀려온 사춘기를 겪으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고등학교 3학년 화창한 봄날, 내 어머니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별로 슬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방인 속의 뫼르소가 겪는 철학적 차원의 사유나 정서와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게 밀려온 것은 분노였다. 어머니와 내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아침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사건건 화를 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않는 딸에게 화가 난 어머니, 종합세트로 전해져 오는 각종 잔소리가 싫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온 딸. 왜 그게 마지막이어야 하는지,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이유로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지, 끊임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 모든 게 신의 선택이라면, 다짜고짜 그의 가슴으로 돌진하여 내 정수리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이러한 탓에 그 시절 읽은 이방인은 문학적 이해와 상관없이 나를 휘감았다. 나는 그날부터 아무 생각 없이 자주 걸었으며, 그럼에도 잘 가지 않는 시간을 애써 죽였다. 도대체 하루가 왜 이렇게 긴 거야?

이방인의 번역본은 여럿이다. 위에서 인용한 것-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출간된 번역본-과 다소 차이가 있는 가장 최근의 번역본을 옮겨 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영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간결한 문장의 리듬을 통해,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뫼르소의 정서를 더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뭥미? 별 차이 모르겠는데, 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무턱대고 감정을 이입하며 책을 읽었던 때와 달리,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는 또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된다. 번역가는 이 첫 부분을 옮기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선택은 전문을 번역하는 과정의 기초가 되니 말이다. 청소년기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도 비슷하다. 지금의 이 선택이 네 인생을 좌우할 거야,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니? 이 말은 맞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내 스스로 뛰어들었던 위험한 순간을 돌이켜 볼 때는 이 말이 맞는 거 같다. 하지만 고3이었던 그해, 진로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선택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나를 돌이켜 보면, 내가 나를 더 따뜻하게 안아 주지 못했음이 오히려 안타깝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을 수정하는 방황의 시간 때문에 걸음이 더렸다. 그 시간이 내게 허락되었음을 고맙게 여긴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선택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 두려움 탓에 나는 아직도 시험을 망치는 꿈을 꾸는 것이겠지. 가 보지 않은 길이 더 빠르고,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작가의 글 - 한현주

아직도 시험을 망치는 꿈을 꾼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곳은 원했던 대학도, 원했던 과도 아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입시를 보기로 한다. 잔뜩 긴장을 하고 시험을 보지만, 결과는 전보다 훨씬 더 나쁘다. 이미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둔 탓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휴학을 하는 건데, 라고 후회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요즘도 가끔 꾸는 꿈의 내용이다. 짐에서 깨어나 보면 진땀으로 베개가 흥건하기 일쑤다, , 나이 서른 중반에 아직도 이런 꿈을 꾸다니 ..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누럴 때도 많지만, 나의 무의식 한 구석에는 내 길의 선택에 대한 의구심이 아직도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가 보지 않은 여러 길 중에, 어쩌면 더 아름답고 더 탄탄한 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니, 자연스러운 꿈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것이고, 연장된 사춘기를 주기적으로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것은 매일 겪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주기가 있다는 점이다.

이따금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친구들을 볼 때, 나는 어이가 없다. 젠장, 또 그렇게 살아 보라고? 아니면 뭐, 돌아가면 다르게 살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그 시절 매일같이 화가 났다, 매일같이 슬펐고, 매일같이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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