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봄희 '붉은 손톱달'

clint 2025. 3. 8. 06:47

 

 

 

고객의 지식과 생각을 지켜내고 재산화 해주는 유망한 북한이탈주민출신 
변리사 김선화는 어느 날 남한과 북한 두 지역에 송출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제안을 받는다. 회사를 알리고 고객을 더 모아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선화는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선화가 북한말로 방송을 진행하지 않는 상황이 

불편한 청취자들은 방속국 게시판에 북한말로 진행하라는 댓글을 상당수
남기게 된다. 여기에 북한 전문 교수가 방송에 출연하여 선화에게 
“북한에서 피망을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선화는 대답하지 못한다. 교수는 “북한에서 피망을 사자고추라고 한다”라고 
말하고 선화는 졸지에 사자고추도 모르는 탈북민이 아닌 것 같은 탈북민이 
되어 버린다. 선화는 다시 북한말을 배워보려고 노력하는데….
계속 생방송에 댓글로, 청취자 전화질문시간에 탈북민이 아니란 악풀과
인신공격이 시작된다.

 



전문직 탈북민 여성이자 엄마인 김선화의 삶을 통해 탈북과정, 정착과정 
그 너머의 모습을 보여주며 ‘북한사람다움’, ‘북한말다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탈북민 출신 변리사 ‘김선화’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착 이후 탈북민이 마주해야 하는 여러 편견과 그 과정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담은 작품이다. 북한이탈주민이자 ‘붉은 손톱달’의 극작가인 김봄희 작가(이하 김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사람다움, 북한말다움’에 대한 인식에 의문점을 가지길 바라면서 대본을 작성했다고 밝혔는데요. ‘북한사람다움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혹은 가지고 있을 ‘편견’을 말한다. 

 

 


이중의 기준을 건너야 하는 이들 - 정명문(연극평론가)
김봉희 작가는 극작, 기획, 연출, 교육 등 다양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그녀는 <벤다이어그 램>(2022) <영리한 너구리 동동이>(2023)에서 불행했던 과거를 가진 탈북자가 아닌 밝고 명랑한 인물들을 그려내곤 했다. <붉은 손톱달>은 전작과 거리가 있다. 북한 사투리를 쓰지 않는 변리사란 직업을 가진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탈북자에 관련한 고정관념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극중 선화는 영어, 북한어, 한국어를 구사한다.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해서 아이가 있으며, 탈북 후 10년이상 이곳에서 살면서 변리사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2장 하나원 교육 에피소드 중 애국가 선율에 다른 가사를 붙이는 장면은 탈북자가 두 이념과 공간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념으로 인해 익숙한 것을 고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정체성의 혼란도 겪을 수밖에 없음이 자연스레 노출되기 때문이다. 선화는 방송출현 회차가 진행될수록 청취자들의 불편한 댓글을 보게 된다. 그녀는 음식 또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것들로 탈북자임을 증명하라는 요청부터 간첩이라는 막말까지 듣는다. 분명 탈북해서 하나원이란 국가기관의 검증을 거친 그녀이지만, 편협한 기준에 놓인 이들은 막무가내이다. 선화의 현재 삶은 방송 외에도 남편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마음이 편한 남편 옆에서만 북한기준으로 육아와 농담을 한다. 작품 곳곳에 영어 단어를 다르게 이해하고, 자본주의적 한계를 명쾌한 사례로 지적하는 선화의 대사는 상당히 정확하다. 그녀의 삶이 이중적인 것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적 태도였다. 하지만 이를 볼 수도 이해할 노력도 하지 않는 시선들이 그녀의 일상을 위협하게 된다. 작품의 출발은 탈북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공연은 주인공이 댓글로 도를 넘는 공격을 받을 때 핑크플로이드의 '머니',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핑크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등의 음악과 춤, 자막들을 통해 소통되지 않음을 표현했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이 지만 소수자로 불리는 경계인들은 여전히 높은 기준에 갇혀 있다. 극본은 탈북자에게 자신의 체제가 문제임을 인정하라는 질문, 혹은 탈북과정에서 불편했던 상황을 노출하라는 요청이 강요와 폭력임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두 경계를 넘나들어 봤던 작가였기에 치열한 문제의식이 표현될 수 있었음이 너무도 분명한 이 작품을 꼭 텍스트로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글 - 김봄희
새들은 저를 품어 키운 북조선과 남한 두 조국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살아갑니다. 두 조국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듯 비슷합니다. 본 작품은 '2024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 창작지원 공모사업 선정사업'에서 심사위원분들의 너그러운 선택이 있었기에 대본으로 탄생될 수 있었습니다. 대본을 보시고 공연이 올라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신 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님과 손아진 연출님, 통일부 남북하나재단의 이하영 팀장님 이재연 담당자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 대본은 지난 몇 년간 봄희는 북한에서 왔는데 나보다 잘사네?"라고 말했던 여러 사람 덕분에 잉태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꽤 오랫동안 남한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북한사람다움'은 무엇이며 '북한말다움'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왔습니다. 그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남한 사람다운' 사회구성원의 모습으로 '잘 살아갈지' 어떻게 하면 '분단을 극복'할 것인지 등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과 언제나 함께 제 가슴속에 등장합니다. 또한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때때로 흔들리고 찢겨 나가는 개인의 명예와 철학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등장합니다. 언젠가 세련되게 글을 잘 쓰는 순간이 오면 쓰고 싶었던 내용이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둘째 아들을 낳고 하게 되었습니다. 세련되진 않지만 진실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습니다. 낯설음에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저를 포함한 우리들의 마음이 다른 이들을 어디까지 규정짓고 고정된 시선 속에 가둘 수 있는지, 그 시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어디까지 정확하다고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 길에서 부끄럽고 부족한 삶이나마 기꺼이 살아냈노라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관객들을 만났습니다. 
첫 공연이 올라가던 날 성당에서 새벽미사 기도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식과 희곡 둘 다 제가 제 몸으로 낳았지만 이제 더 이상 제것이 아닌 존재들이라는 것을. 부디 이제는 여러분들의 것이 된 제 희곡을 통해 저에 대한 반성과 지난날에, 또 앞날에 우리 모두 겪어가야 할 시선에 관한 고민이 조금이나마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살아 있음을 살아낸 것임을 증명받을 것입니다. 언제나 저를 감싸안아 위로해주던 죽음을 물리쳐준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제 고향의 하늘 아래서 기쁘게 별 헤는 밤이 오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신 예술인 분들, 공연장에 와주신 관객분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온몸과 마음을 다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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