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만희 '돌아서서 떠나라'

clint 2025. 2. 23. 08:09

 

 

신출내기 여의사와 성처투성이 환자로 처음 만난 두 사람.
예쁘고 똑똑한 인텔리 여의사 채희주와 주먹을 휘두르지만 순진한 조폭 건달 공상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만나 평범하지 않은 연애를 시작하며,

극과 극인 그들이 서로를 닮아가며 서로를 품어간다.

조직 분쟁 이후, 2년 6새월간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가 채희주 앞에 불쑥 나타난 공상두.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 2년 6개월 전 살인을 했던 공상두는 자신을 대신해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부하의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 자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마지막으로 희주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다시 올 긴 이별을 예감한 채희주의 부탁으로

그날 밤 두 사람은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데 ...

 

영화 '약속'으로 알려진 그 원작이다.

 

 

이 작품은 폭력 조직계 두목 공상두와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재기발랄한 여의사 채희주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을 경쾌한 유머와 웃음으로 그린 사랑 이야기이다. 2년 6개월간 잠적했다가 채희주 앞에 불쑥 나타난 공상두. 무대는 넓은 들판과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채희주의 시골집이다. 신출내기 여의사와 상처투성이 중환자로 처음 만났던 두 사람. 이 둘을 하나로 이어준 것은 신앙과도 같은 절대적 사랑이었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 상대 조직의 두목급 거물을 살해하고 2년 6개월을 숨어 지내면서 공상두는 속세의 모든 것을 정리했고, 자기 대신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인 부하의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 자수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다시 올 긴 이별을 예감한 채희주의 강요로 그날 밤 두 사람은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자수를 결심한 공상두였지만 그는 기약없는 이별이 못내 아쉬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때 채희주는 공상두에게 “돌아서서 떠나라”라고 말하고, 공상두는 사랑하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서서 떠난다. 

 

 

작가의 글 - 이만희
오래 전, 작가는 전국구 보스 출신의 한 노신사와 만나게 되었다. 이분이 작품의 소재를 주신다고 그 시절 이야기를 하시는데 밤새 폭력, 살인 이런 이야기들뿐 이었다. 그러다가 기똥찬 사랑 얘기 없냐고 물었는데 Jazz 피아니스트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조직생활 중에 사건을 일으켜서 4~5년 징역을 살게 되었는데 형무소에 들어가기 전에 사랑하던 여인을 만나야 겠다고 형사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는 수갑을 찬 채로 그녀를 찾아가 기댜려주겠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가 그러겠다고 답을 했다. 출감 후 바로 그녀가 있던 Jazz Bar를 찾아갔는데 이미 그녀도, 그 Jazz Bar도 흔적없이 사라져었다. 노신사는 그 이후에도 그녀 소식이 들린 곳이라면 브라질, 미국, 일본까지 찾아갔는데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고 지금까지 총각이라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때 그 신사분의 나이가 60세였다. 이야기를 끝날때 밖에는 동이 터오고, 그 분이 눈물을 한 방울 흘리시는데,
 "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슬픈 사랑과 조직 보스 이야기에서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가 탄생했다.

 

이만희 작가

 

(……) 인간으로서는 극복할 수도 견디어내기도 힘든, 그러나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그런 고통을 바로 앞에 둔 인간의 실존적 고민 역시, 이만희 작품의 공통적 요소이다. (……) 사회구조나 역사적 산물처럼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에 맞듯, 지나가다가 전혀 예상치 않게 트럭에 깔리듯, 그렇게 죽음처럼 갑작스레 다가오는 엄청난 고통이 던져진다. 삶 전체를 뒤흔드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면서, 오히려 과거의 쓸데없는 집착을 떨어버리고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명예와 부 때문에 털어놓지 못한 과거의 자신의 죄악과 부끄러움, 사랑의 감정 등을 이제 있는 그대로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털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 이만희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완벽한 구성에 의해 차근차근 풀어가지 않는다. 작가는 이 기본틀을 놓고 두어 명의 인물들로 하여금 이 주제의식을 유창한 설법처럼 펼쳐놓다가, 작품의 중반 혹은 그 이후에 충격적인 엄청난 사건을 던져버림으로써 구성적 결점을 틀어막는다. (……) <돌아서서 떠나라>도 그다지 특별한 사건의 진전 없이 채희주와 공상두의 말로만 극을 진행시키다가, 거의 마지막 부분에 공상두가 자신의 자수 결심을 말한다. 그래서 극은 뒷부분에서 갑자기 활기를 띠고,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는 채희주의 결단으로 둘만이 거행하는 결혼식 장면은 그 꽉 찬 고뇌와 갈등을 잘 표현한 백미이다. 그러나 한편<돌아서서 떠나라>에서는 이전 작품처럼 후반에 삶의 의미에 대한 충격이 던져지기보다는 애틋한 사랑이 더 돋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졌음이 맨 앞 장면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앞의 작품들보다 더 애정극적인 재미가 강화되고 작가의 주제의식은 약화되었다. (……) -<금오문화>, 이영미, 1996년 9월호.

 

 

 

(……) 1990년대 연극계의 주요 인기 작가로 부상한 이만희는 근작인 이 작품에서 자못 진지하게 키에르케고르의, 인간 실존의 삼단계론(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음을 밝힌다. 착하고 의리 있고 애국자인 폭력조직의 보스와 덜렁대고 애교스럽고 총명한 여의사간의 만남, 사랑, 이별, 재회 그리고 죽음. 그 자체로 흥미로운 플롯을 에워싸고 템포감과 감각으로 무장한 대사의 통통 튀는 진행. 그리고 적당한 지점에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 시작하여 그들의 영원한 이별을 암시하는 “돌아서서 떠나라”라는 대사로 절정을 이루며 막을 내린다. 관객이 철학적 사유를 곱씹을 여유 없이 대개 스타카토로 진행되는 이 무대에서, 작가가 의도하였던 키에르케고르식 실존의 의미들은 저 깊은 곳 어딘가에 묻혀 버리고 마는 점이 우선 아쉽다. 이 무대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따라서 어떤 철학적 반성보다는 드라마<모래시계>의 성공 이래 특히 대중의 히어로로 뜨고 있는 지하 폭력조직의 두목이라는 인물의 성격이다. 이 인물이 관객에게 어필하는 데에는 근래 여러 종류의 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온 한명구의 연기가 큰 힘이 되고 있다. 최고 엘리트 신부와 영웅적 최후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이 엄청난 인물을 그는 전혀 소란 떨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소화해 낸다. 그들의 재회장소이자 여의사의 은신처를 구현한, 박동우의 무대 장치가 과장 없이 품격을 지키고 있듯이……. 그 안에서 여의사 역의 정경순 역시 열연한다. (……) -<여성문화예술소식>, 이화원, 199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