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 종류보다 수백 배, 수만 배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깔려지게 된다.
이 작품에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라디오 방송의 한 프로그램의 MC인 혜은이 있고,
그녀에게는 가수인 남자친구 민성이 있다.
그 사이에 혜은의 방송 PD가 있고, 그 세 사람 사이에
PD의 딸인 묘경이 가세한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아무도 모르는 한 사람, 하지만 그 모두를 알고 있는 한 사람.
그로 인해 이 이야기는 진행되고 끝마쳐 진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또 사람이 사람에게 집착한다는 것.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다는 것.
무방비 상태의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정신과 자아의 세계는 으깨지고 갈려나간다.
서로를 훔쳐보고, 응시하며 그 사람과 닮아가는, 그리고 그 사람의 깊은
그 어딘가까지 다가가려는 사람들.
한 무대안의 다섯 사람의 짧지만 긴 이야기이다.
전혀 서로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Opera와 스토킹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통해, 작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치 서부의 총잡이가 등장하는 어떤 영화에서처럼 무차별로 쏟아낸다. 작품 속 정혜은은 ‘오페라 산책’이라는 라디오 방송의 DJ다. 정혜은이 소개하는 오페라는 작품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을 들어봤을 <리골레토>나 <라 트라비아타>부터 조금은 낯설기도 한 <토스카>, <살로메> 등 다양한 곡이 줄거리를 연결하는데 힘을 실어준다.
등장인물들의 어긋난 사랑은 스토킹으로 이어진다. 민성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묘경, 혜은의 마네킹을 만들어놓고 혜은을 바라보듯하는 진호, 혜은에게서 죽은 부인의 흔적을 찾는 성보.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방적 사랑의 진실은 집착이다. 서로에 대한 갈망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그러나 서로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 사랑은 그렇게 집착으로 엇갈려만 간다. 거울과 스토킹은 ‘엿보기’란 교묘한 매개로 하나로 엮인다. 오페라와 라디오. 거울과 스토킹은 일상과 환상을 엇갈리게 한다.
하지만 전혀 빠르지 않고 천천히, 길지 않은 시간동안 쏟아내는 대사들과 무대 디자인을 통한 들려지지 않는 또 다른 이야기들은 맑은 하늘에 피어나는 한줄기의 연기처럼 스산히 나타났다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깊은 여운만을 남긴 채...
두 여자와 세 남자..
서로가 먹이사슬과 같이 연결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속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눈다.
현대인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가?
고립된 섬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무언가에 파묻혀 매니아처럼 살아가는 인간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타인을 자기방식으로 일방적으로 해석해나가는 인간.
내 불안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끝없이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모습.
그리고, 사람의 애정 또한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는 모습.
그래서, 타인의 냉담한 반응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고,
변화되는 인간의 관계에 대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절망과 희망의 줄타기를 시도하는 모습들......
일상과 환상의 혼돈은 서로의 만남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고
욕망과 현실이 교차되고 충돌하는 것으로 혼돈은 더욱 가중된다.
거울의 이미지를 통한 현실과 허상의 중첩.
시공간은 중복되고 현실과 환상이 동일한 무게로 서로 오버랩된다.
소유 중심의 개념이 발생시킨 ‘스토킹’,
일상이 픽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픽션이 일상이 되는 역전.....
이들은 끝없이 서로에 대해 몸부림치지만
정작 이들 간에는 자신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진지함은 없다.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들이다.
작가의 글 - 안경모
스토킹. 당대의 폐부를 파고드는 현대인간의 모습을 직접 다루는 작품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즈음, '스토킹'이라는 사회현상은 현대를 바라볼 수 있는 잠망경같은 것이었습니다. 스토킹은 몇몇 사이코들의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소유불능과 소외의 결과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고립된 섬처럼 수많은 '나'들로 부유하며 집착하고, 폐쇄된 뷰-파인더로 자신만의 허상을 실상에 대리시켜 자신을 유지해나가는 현대인간들. 저마다의 대상을 찾아 스토킹하며 살아 가고 있는 우리는 스토커였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방송과 오페라, 연극에서는 다소 무리스러운 '들려주는 라디오 방송을 택했습니다. 대신 자유로운 시공간의 날개를 탔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리는 줄거리와 인물을 가진 오페라는 작품을 다소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에 소개되는 6개의 오페라(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리골레토, 토스카, 라트라비아타, 호프만이야기, 살로메)는 일상을 반영한 픽션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가 되어 일상에 투사됩니다. 그래서, 오페라와 일상의 이중적 구조라기보다는 점차 오페라적 픽션에 잠식당하는 일상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허상이 실체를 잠식한다'는 역전이 우리의 부조리한 모습이니까요. 거울. 더불어, 실상과 허상에 대한 극적 탐구는 거울로 전면화 시켰습니다. 실체는 수많은 거울들로 겹쳐지고, 어느 순간 우리의 시선은 실체를 비추고 있는 거울에 닿게 됩니다. 실상과 허상의 경계상실, 그 아슬한 줄타기, 역시 우리의 모습 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모습을 다루기에 제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작품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배를 갈랐지만, 그 복잡한 꿈틀거림에 넋 놓고 지켜본 적도 수차례였고, 불필요한 메스질도 여러 번, 그리곤 무작정 봉합수술부터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부족함을 메워가는 과정이 배우들에겐 참 힘든 과정이라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됩니다.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이해하며 끊임없이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김세동형을 비롯한 배우 모두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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