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사의 딸인 루이제는 영주의 궁정에 수상으로 있는 폰 발터의 아들인 소령 페르디난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가망성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수상은 높은 귀족의 신분으로서 원칙에 철저하며
궁정에서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아들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언젠가는 아들을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다.
그는 다만 자기의 아들이 루이제를 일시적인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만 용인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은 사내다운 짓이라고 내심 만족하며 보상금도 지불할 용의가 있단다.
한편 시민적인 자의식이 강한 악사 밀러는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이런 애정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정하며 딸에게 단념할 것을 권한다.
수상은 궁정에서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페르디난트에게 영주의 애첩인 밀포드 부인과
'외견상' 결혼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반발하자 역시 루이제를 사랑하는 서기
부름과 간계를 짜낸다. 그들은 두 연인을 떼어놓기 위해서 페르디난트가 루이제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간계를 꾸민다. 그들은 우선 밀러 부부를 구속하고 그들의 석방 조건으로
루이제로 하여금 시종장 폰 칼프에게 연애편지를 쓰도록 강요한다.
서기 부름은 이 편지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겠다는 루이제의 맹서까지 받아 둔다.
이 편지를 '우연히' 입수한 페르디난트는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그는 그녀에게 어디론가 도망가자고 하지만 그녀는 늙은 부친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한다.
엄격한 종교관 때문에 그녀는 그렇다고 맹세를 깨뜨리고 편지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도 없어 그의 온갖 의심과 모욕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페르디난트는 마침내 그녀가 가져 온 레몬주스에다 독약을 타서
그녀를 독살하고 자신도 그것을 마신다. 죽음이 임박해 오자
루이제는 맹세를 지킬 의무감에서 해방되어서 그 편지는 바로 수상이 강요해서
쓴 것이라고 고백한 다음 페르디난트를 용서하고 눈을 감는다.
그녀의 뒤를 이어서 페르디난트도 숨을 거둔다.
이 희곡은 1784년 공연된 다음 이어서 출판되었는데, 그 직후부터 동시대인들의 평가는 찬양과 배척으로 양분 되었다. 예컨대 소설 〈안톤 라이저〉의 저자인 카를 필립 모리쯔(Karl PhilippMoritz, 1756-93)는 "우리 시대의 치욕 거리인 작품”이라고까지 혹평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는 배척하는 경향이 점차로 약화되면서 찬양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파토스를 배척하는 자연주의는 실러를 적대시 하였으나 이 희곡의 사회비판적인 특성 때문에 호감을 갖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이 작품은 당시 독일의 무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쉴레겔(August Wilhelm Schlcgel, 1767니845),, 그릴파르처 (Franz Grillparzer, 1791-1872). 브렌타노 (ClemensBrentano, 1778니842), 헤벨 (FriedhchHebbel, 1813-63) 등은 이 작품을 혹평하였다.
반면 연극 비평가였던 폰타네 (Theodor Foniane,1819~98)는 20여 번이나 이 작품의 공연을 보고도 “항상 새롭게 매료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95)는 이것이야말로 "독일 최초의 정치적 경향극”이라고 찬양하였고. 오토 브람 (Otto Brahm, 1856~1912)은 〈간계와 사랑〉은 독일 시민비극의 최고봉이라고 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인 프란츠 메링 (Franz Mehring, 1846-1919)은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다음으로, 그리고 그것과 함께 〈간계와 사랑〉이 고전문학의 가장 혁명적인 희곡” 이라고 역시 극찬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작품이 독일의 무대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이렇게 되는데는 연출가 막스라인 하르트 (Max Reinhardt, 1873-1943) 의 공로가 컸다. 1945년 이후엔 다시 이 전통이 이어졌다.
〈간계와 사랑〉은 실러의 어느 작품보다도 물의를 일으킨 문제작이며 그 해석도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작품의 사회비판적인 경향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이 작품을 '사회극' 또는 '정치적 경향극'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와 정반대로 이 작품을 순수한 사랑의 비극이라고 보고 형이상학적, 종교적 측면에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간계와 사랑〉은 독일의 절대군주제라는 일정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 페르디난트와 루이제라는 두 젊은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귀족과 시민계급이라는 신분 의 차이와 시민계급의 제한된 의식세계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두 젊은이의 사랑과 유토피아적인 삶을 방해하는 외적인 제한과 내적인 제한이 동시에 다루어지고 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실현이라는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는 이상주의적인 페르디난트와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애초부터 이 세상에서는 사랑의 실현을 체념한 루이제는 그들의 사랑을 발전시켜 나갈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사랑과 삶을 파괴해 버린다.
괴테와 실러
독일 문학에서 괴테와 실러는 항상 같이 언급되는 커다란 두 봉우리다. 두 작가는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실현된 인간 완성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1794년부터 실러가 사망하기까지 약 10년간 두 시인은 우정관계를 맺고 서로 문학적인 자극을 주어 독일 고전문학의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런 공통점과 친교에도 불구하고 두 시인은 그 출신과 본질이 상이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괴테가 자유 제국도시인 프랑크푸르트의 명문 가정 출신인데 비해 실러는 절대군주가 지배하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소도시 마르바하에서 태어났다. 청년 괴테가 체험한 것은 명랑하고 관능적인 로코코의 세계인 데 비하여 실러는 도덕적으로 엄격한 경건주의의 소시민 가정에서 자랐다. 그리하여 두 시인의 문학 세계는 필연적으로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괴테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예술의 융합이 유기적인 발달로 완성되었다. 이에 반하여 실러의 문학은 이념을 바라보고 현실을 끊임없이 극복하는 것이다.”
실러는 우리가 접근하기에 그리 용이한 작가는 아니다. 이는 우선 그의 문학과 사상이 심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러의 문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시대적 • 정신적인 전제 조건이 오늘날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실러 연구는 몇몇 독문학자들을 중심으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 연극공연을 통한 일반적인 수용은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그러면 오늘날 독일의 무대에서 실러는 희곡 작가로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동독을 제외한 독일어권의 한 공연 통계에 의하면 실러는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브레히트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작가이다. 또 실러의 작품별 공연 통계에 의하면 <간계와 사랑>, <돈 카를로스>, <군도(群盗)>, <발렌쉬타인>, <오를레앙의 처녀>, <빌헬름 텔> 등의 순서로 공연이 많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 이 <간계와 사랑>은 최다 공연순위에서 7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예만 봐도 실러가 현재까지 독일권의 무대에서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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