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 여기에 ‘언뜻 보면 소녀 같기도 하고
늙지 않는 노파 같기도 하고, 혹은 마치 수백 년을 산 듯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세자매가 등장한다. 덜컹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동창회에 가는 길,
그들은 서로 동창회에 초대받은 게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싸우다가 사고로
허수아비를 들이받는다. 하지만 허수아비는 죽지 않고, 꿈인지 현실인지
미묘한 상태에서 세 자매와 차례로 춤을 춘 뒤 사라져 버린다.
이후 게 자매의 배가 서서히 불러 오면서 이들은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설렘 속에서 허수아비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고, 기다림에 지친 세자매는 허수아비도, 동창회도,
이 모든 이야기도 실은 다 자기들이 만들어 낸 상상과 거짓말이라고 서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갇힌 그녀들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이야기인지 알지 못한 채 길을 잃는다.
결국 서로 아이를 꺼내려고 싸우던 첫째와 둘째는 죽고 셋째 혼자 남게 되는데,
다시 암전 후 무대가 밝혀지면 첫 장면과 똑 같은 장면이 이어진다.
세 자매는 각기 역할을 바꾼 채 다시 한번 처음과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불쌍하다. 아빠는 집을 나갔고 엄마는 소녀를 증오한다.
소녀는 그런 엄마가 무섭다. 소녀는 엄마의 눈을 피해 옥수수 밭 사이로 숨어든다.
그 한가운데 아무도 모르는 소녀만의 비밀의 공간이 있다.
그녀만의 안식처이자 놀이터인 공터. 이곳에서 소녀는 언니들을 만난다.
멀리서 소녀를 잡으려는 미친 엄마의 총소리가 들려온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소녀와 언니들은 낡고 오래된 사진첩을 열듯
아주 은밀하고 어두운 그들만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마치 이야기 책 속에 들어온 듯, 그 속에는 개울에 코를 박고 죽어버린 삼촌과 뻐드렁니,
누렁 코, 소 방울과의 동창회 파티, 차에 치인 허수아비와 그 허수아비의 애를 배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허수아비 총잡이의 화려한 일대기와 함께 춤춘다.
해질 녘. 언니들이 죽는다. 언니들과 만들었던 기억들도 모두 사라진다.
소녀는 다시 혼자다. 하지만 이제 소녀는 더 이상 엄마가 무섭지 않다.
소녀는 말한다. “난 이제 언니들 없이 혼자, 끝없는 시간을 살아가야 돼”
소녀는 더 이상 죄의식과 두려움에 떠는 작고 불쌍한 소녀가 아니다.
작가의 글 - 최치언
인간은 죄를 통해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고민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죄의식을 다루는 작품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쌍둥이 자매들을 통해 여성성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에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죄의식에 더 깊게 강요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의식은 폭이 넓은 개념으로 금기된 것을 어길 때 발생하는 불안, 공포, 막연한 희망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화적인 형식을 차용하여 극을 보다 더 깊은 무의식의 저변으로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지껄여 대다시피 뱉어내는 대사와 돌발적인 행위는 죄의식의 외형을, 비현실적인 공간구조는 내형을 의도하였습니다. 인간은 되를 통해 자신이 누군가를 알게 되지만 또한 죄를 통해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희곡은 비극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연극 <언니들>은 파괴된 가정, 그것으로 유린된 어린 시절, 억압되고 잘못된 성적 욕망들은 죄의식을 만들어내고 만들어 낸 죄의식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언니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주문을 외듯 술술 지어내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 않은 분위기와 화법으로, 하지만 진솔하며 솔직하게 풀어내고 있다. 나이가 분명치 않은 세 명의 여자들이 찾아가는 인생의 성장 통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강요, 구속 받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현실의 자아를 재인식시켜줄 것이다.
<언니들>은 주인공 세 자매의 “역할놀이”는 모든 사건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고리로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작품을 보다 흥미롭게 접근하여 이해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게 한다. 이를 통해 비틀린 욕망에 대한 치유를 하나씩 해가면서 조금은 난해 할 수 있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집필된 희곡<언니들>의 주제의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 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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