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범석 '묘지의 태양'

clint 2024. 12. 9. 08:09

 

 

1973년 현대문학지에 발표한 단막 작품이다.

 

묘지의 태양은 관광여행사에서 일본어 통역원으로 일하는 딸과

일본으로 징용을 갔다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고 피폐해진 아버지가 등장한다.

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화기를 설치하고,

아버지는 반복해서 전화기를 고장 내는 행동으로 표면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전화선을 끊거나 진동판을 빼는 행동은 일본에 대한 분노와

억울한 감정에서 기인한다. 전화기가 고장 나면 일본어 통역으로 돈을 버는

딸의 행동을 막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아버지는 원폭 피해와 관련해서 수차례 불만을 토로했음에도

일본 측의 변화가 없자 치료와 권리를 포기한 상태이다. 

체념한 아버지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딸은 일본 여행객을 상대하며 돈을 번다. 

살아야 한다는 딸과 이미 묘지 안에 갇혀 죽었다는 아버지의 대립은

딸이 일본여행객과 약속을 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드러나듯

딸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한 차례 배경막을 이용하여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장면.. 영상과 음향을 활용한 이 회상 장면은 아버지가 30년 전 겪었던 원폭 당시의 경험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

 

 

 

 : 그래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힘.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버릴 수 없어요! 이제 와서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상을 상기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 말씀대로 우린 이제 생존조차 어려울 지경이 되고 말 거예요!

아버지 : 하필이면 네가 일본말을 익힌 덕으로 내가 살아야 하겠니? 전화로 불러내면 나가서 일본 놈에게 말을 팔아야만 돼...

 : 현실이에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지난 날 일본에게 희생당한 피해자이지만 일본말로 생을 유지하기에 일본을 미워할 수 없다는 딸의 태도는 소통의 몸과 상응한다. 아버지에게는 거부하는 일이 현실이지만, 일본을 이용하는 일이 현실이라 여기는 딸의 위치는 작가에 의해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다. 과거사에 매이는 것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소통의 몸은 인정받는 몸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보살핌의 윤리가 강요되었다는 점과 유대의 문제를 과거사 탈피와 엮어서 언급하려는 시각은 작가의식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묘지의 태양>이란 제목은 작품을 보거나 희곡을 정독하면 차범석 선생이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할 듯 다가온다.  

 

차범석전집 4편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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