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흣날 백두산 아래 나라 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 이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 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 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 시절에도 사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 양상(賢君良相)인들 세살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재벌), 국회의원(국獪의猿), 고급 공무원(고급功無원),
장성(長猩), 장차관(暲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가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는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렸다.
시인 김지하가 1970년 사상계에 발표한 풍자 담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
1970년대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비리를 해학적으로 풍자하였다.
당연히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 후폭풍은 엄청나서
김지하를 필두로 사상계의 편집진들이 줄줄이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 사상계는 이 사건을 빌미로 강제로 폐간되었다.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점이지만 오적은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쓱 읽어만 봐도 일반적인 현대시와 다른 몇 가지 독특한 점들이 있는데 함축적인 운율미가 대부분인 현대시와는 달리 한국 고유의 전통 시가인 가사, 판소리, 타령의 형식을 빌렸다는 점, 내용적으로 보자면 이 시는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였지만 형식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긴 한국의 고유 시가를 부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연구자들의 견해도 존재한다.
오적 전문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화자 본인은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전달자'다. 아예 구절 중간에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구전된 이야기'라고 못박았을 정도다. 풍자와 조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화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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