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하는 쥐>는 매우 복잡한 구조의 작품이다.
누가 주인공 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뿐 아니다. 공간도 혼란스럽다.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하는데, 동시에 무대에 나올 수는 없다.
한 공간이 나오면 다른 공간은 가려져야 한다.
작가는 거실과 침실이라는 두 공간을 들창문으로 나누어 놓는다.
거실은 손님을 맞이하고 가족이 생활을 공유하는 공간이고,
침실은 개인적인 공간이다.
거실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라면,
침실은 가면을 벗고 본모습으로 살아가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서 등장인물이 침실에서 거실로 갈 때 브레뒤모의 가면을 쓴다.
이런 면에서 거실을 무대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침실은 무대에서 퇴장해 가면을 벗은 곳이니 대기실이나 분장실인 셈이다.
이러면 연극 안의 연극, 즉 롤플레이를 하는 연극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브릭이 등장해 이 대기실마저 감방으로 만든다.
또 다른 연극이 펼쳐지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연극이라는 말일까?
거실에서 브레뒤모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배우는 롤이다.
롤Roll이라는 이름에서 역할이라는 뜻의 동음이의어 롤role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롤은 대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롤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처음에 등장한다.
모든 상황이 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거실에서 휠체어에 앉아 브레뒤모 역할을
하던 롤은 침실에서는 가면을 던지고 일어나더니 젊은 시인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의 정체는 롤, 즉 대역이다.
읽으면서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롤을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보기 때문이다.
롤을 배우라고 설정하고 읽으면 덜 혼란스럽다.
쥐 가면을 쓴 시발쥐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사형수인 시발쥐는 쥐 가면을 쓰면 감방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다.
초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쥐 가면을 쓰면 진짜 쥐처럼 감방 사이의 쥐구멍을 통해 어디든
배회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코드는 배신이다.
제목을 '배회하는 쥐'라고 정한 이유도 이 때문인 듯하다.
서양에서 쥐는 배신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쥐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배신자는 여기저기에서 출몰한다는 상징일 수도 있다.
후반부에 이 쥐는 롤 대신에 브레뒤모 가면을 쓰고 판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롤과 쥐는 가면이라는 도구로 정체성을 가리지만 다른 인물들은 가면을
쓰지 않고 그 정체성을 가리고 있다. 브릭은 조르주라는 인물이 연기하는 역할이고,
켑은 브레뒤모가 연기하는 인물이다. 노에미와 마담 브레뒤모는 동일인물이다.
거실에서는 늙은 부인인 노에미가 감방으로 꾸민 침실에서는 젊은 노에미가 된다.
극 마지막에 롤과 쥐는 둘 다 브레뒤모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런데 이상주의자인 롤을, 시니컬하고 현실을 추구하는 쥐가 죽인다.
죽은 롤을 쥐와 노에미가 들고 퇴장하면서 연극 속의 연극은 끝난다.
샤를 브레뒤모와 시종 조르주가 이 연극의 주인공인 것이다.
샤를 브레뒤모가 기획자이고 조르주가 무대감독인 연극에 자신들도 배우로
참여해서 벌인 연극 속의 연극, 그리고 그 속의 연극이다.
액자 연극보다 한층 더 복잡한 구조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구성했을까?
우리의 정체성이 이렇게 복잡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젊은 시절의 이상은 죽여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
판사라는 정체성에 숨어서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는 우리 인간들의 정체성은
이 연극보다 더욱 복잡하다.
법복과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돌아오면 평범한 인간이 되어 자신들이
사회의 피해자라고 외치고 있는 우리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이 가면을 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죽음이라는 피난처를 준비해 놓는다.
이 작품은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쓴 최고의 희곡 가운데 하나이며,
1993년 미셸 라스킨Michel Raskinc 연출로 프랑스 노르망디의 라 코메디드 캉과
파리의 빌레트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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