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민기 록 뮤지컬 '개똥이'

clint 2024. 10. 13. 05:59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숲속의 시냇물 줄기를 막아버리자, 
곤충들의 세계에 가뭄과 기근이 닥친다. 
쓰레기에 묻어 들어온 바퀴벌레들은 반딧불을 없애고 
숲속을 완전한 어둠의 세상으로 바꾸려고 '벌레들의 전쟁'을 일으킨다. 
수많은 곤충들이 죽은 뒤 곤충세계의 은자인 쇠똥구리가 
살아남은 반디의 알과 날개 부러진 귀뚜리를 데려다 키우는데 
벌레들의 전쟁때 독가루를 살포하다 중독이 된 나비들이 찾아 와 
똥구리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다.
알에서 깨어난 반디의 애벌레에게 닥칠 위험을 걱정한 똥구리는 
아이의 몸을 온통 개똥으로 감싸버리고 이름마저 자신의 아이인것처럼
'개똥이'라고 지어 신분을 숨긴다. 
순진하게 자라던 개똥이는 어느 날 '죽음의 연못'에 비친 
자신의 흉칙한 몰골을 보고 실망하여 온몸을 쥐어뜯으며 자학한다. 
개똥이의 찢어진 몸에서 흘러나온 빛의 냄새를 맡고 반디의 아기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바퀴들은 반디아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즉, 쓰레기속에 남아있는 설탕가루와 방부제를 섞어 '흰가루떡'을 만들어 
벌레들의 전쟁때 살아남은 벌들을 중독시켜 그들로부터 '황금뿔'을 빼앗아
그것으로 황금날개옷'을 만들어 아이들을 유혹한다....

 

 


심성이 비뚤러진 개똥이는 황금날개옷을 입어보러 가지만 
더럽다는 이유로 쫓겨나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한다. 
뒤쫓아 왔던 귀뚜리가 개똥이를 붙잡고 개똥이가 바로 반디아기임을 
알려준다. 바퀴들이 몰려오자 귀뚜리는 황금날개옷에 개똥이를 숨긴다. 
그러자 황금날개옷은 개똥이의 빛이 닿자 오그라들며 개똥이를 가둔다. 
황금날개옷은 바로 바퀴할멈이 반디를 잡으려고 만든 천년감옥이었다. 
귀뚜리가 바퀴들에게 처단되려하자 황금날개옷에 갇힌 개똥이는 
달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눈이 멀어 친구들에게 가지 못한다는 먹구름이 
그 앞을 가리고 만다. 점점 조여오는 천년감옥에서 괴로워하는 개똥이에게
힘을 주기위해 귀뚜리는 시냇물의 노래를 부른다. 시냇물의 노래를 들은 

먹구름은 친구들을 찾아 개똥이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때마침 비와 함께 벼락이 개똥이의 천년감옥에 떨어져 천년감옥이 둘로 
쪼개지고 개똥이는 하늘로 빛을 내며 날아 오른다. 
먹구름의 비로 쓰레기더미는 휩쓸려가고, 맑게 개인 밤하늘에 
수많은 반딧불이 떠오른다. 숲속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우리가 김민기의 음악극 노래극에 대해 기대하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노래 창작자이자 연극인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김민기라면 음악극에 걸 맞는 극본을 선택하고, 음악극다운 아리아 가사와 연극적인 노래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 안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70년대. 그러니까 그의 나이 20대 초중반에 지은 노래들부터, 보통의 서정적 정서 토로의 노래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들이 많다. <종이연>, <서울로 가는 길>, <식구 생각>, <작은 연못>, <백구>, <꽃 피우는 아이>, <강변에서> 등 상당수의 작품들이 그러하며, 다른 노래들도 비교적 화자와 설정된 정황이 뚜렷하다. 게다가 그는 악곡과 가사를 기가 막히게 잘 맞추어 낸다. 그의 노래에서 악곡은 가사에 덮씌워진 무엇이 아니며, 가사와 악곡은 완전히 함께 호흡한다. 그래서 아무리 타악기로 쿵쾅거리고 비트가 강한 <제발 제발> 같은 노래라도, 우리 말의 강약과 악곡의 강약이 일치하여 가사가 제대로 다 들린다. <지하철 1호선>에서 독일어로 된 노래를 우리말답게 번역하여 다듬어낸 솜씨는 놀랍다. 또한 가사에서 만들어지는 극적 분위기에도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며, 다양한 양식의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가사의 극적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뽑아낸다. 이런 그의 역량은 이미 그 이전의 음악극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록 오페라라고 이름 붙일 만한 작품은 이번 <개똥이>가 처음이 아닌데, 일찍이 1978년의 <공장의 불빛>이 소품이지만 록 오페라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모든 대사가 다 노래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포크로 출발한 그의 음악 세계와는 달리 일렉트릭 기타나 드럼 등을 사용한 록적인 음악이 (포크, 국악풍의 음악과 함께) 구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의 노래에 꽤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로 시작하는 찬송가풍 <이 세상 어딘가에>나. "예쁘게 빛나던 불빛.."으로 시작하는 포크풍의 예쁜 여성 합창 <공장의 불빛> 정도를 공장의 불빛>의 대표곡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새벽 출근길의 음침한 분위기의 음악적 묘사도 뛰어나며, 사장과 과장. 비서가 모여 노조 설립 방해 음모를 하는 장면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가야바 음모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극적이다. (이영미- 연극평론)

 

 


<개똥이>를 위한 변명 - 김민기 작가, 연출의 변
1984년 처음 기획 당시, <개똥이>는 윤기현의 동화 '사랑의 빛'을 원작으로 한 아동극으로 준비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여러 상황으로 인해 공연이 좌절되고, 10여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개똥이>는 다른 여러 생각들이 뒤섞이면서 애초의 원작과 아동극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주를 이루었던 것들은 현대 산업문명 전반에 대한 의구심이었는데, 이는 농사를 짓던 시절 땅과 함께 했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어서,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역시 흡족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는 못한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스탭들의 도움으로 많은 부분들이 개선되었으며 특히 의상, 무대 등 시각적인 면과 편곡 등에서 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이리라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내용이 너무 무겁지 않느냐는 지적들이 많았는데, 이는 문명의 대전환기라 할 수 있는 현시점의 여러 절망적인 상황들을 전제로 하다보니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환경문제'의 '환경'이라는 낱말조차 인간중심적인 한에서는 인간의 자가당착인 산업문명 자체에 대한 반성의 시각은 구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거꾸로 자연으로부터 인간, 산업,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개똥이>에서는 차용해 보았으며 일부 동양적인 상상력들에서 희망의 가설을 찾아보고자 했다. 아직은 이러한 생각들이 그저 잡다하게 퍼져 제대로 추슬러지지 못하고 있지만, 완벽한 작품이라는 것이 한두해에 가능한 것이 아니고 보면 지금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조그만 위안을 삼으려 한다. 이 공연이 최종적인 작품은 아닐 것이며, 이번 공연의 또다른 실패의 경험을 살려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향한 수정작업을 계속해 보다 나아진 <개똥이>를 다시 선보일 것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