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기훈 '어떤 가족의 만찬 '

clint 2024. 10. 12. 08:53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된 구역이 혼재되어있는 도시의 끝자락,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곳, 비닐하우스다.
그러나 분명 삶의 온기가 있는 그곳에는 고등학교 2학년 소녀가장 언니, 
중3 여동생,  몸이 아픈 어린 남동생, 그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함께 살아간다. 언니는 방과후 고깃집 알바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중3 여동생은 언니 말에 반발하면서도 따르지만 불만이 많다.
오래전 가출한 어머니와 몇 년에 한 번씩 집에 돌아오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를 대신해 맏딸인 언니가 가정을 지킨다. 
대학은 고사하고 자신의 미래마저 헌납한 채,
필사적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려고 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온다. 술도 끊고 새사람이 됐다고 하지만
돈이 없어 돌아온 걸까.... 큰딸이 알바로 번돈 3백을 찾아내
도박으로 다 날려버린다. 이곳이 헐리면 어디라도 살 집을 구하려
모은 돈인데... 게다가 술을 먹고 들어와 이곳에 불을 지른다...
이 가족은 어찌 될까?



'어떤 가족의 만찬'은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동행'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으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비추어온 프로그램 '동행'에 대한 오마주이다. '어떤 가족의 만찬'이야기는 현재 우리 공동체 어딘가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이성적으로 직시하도록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결손가정의 소녀 가장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치열함으로, 우리 공동체 어딘가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이성적으로 직시하도록 구성했다. 인구절벽에 세 가구 중 한 가구가 1인 가구라는 현실,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 현상이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닌 사회적 변화 속에서 ‘어떤 가족의 만찬’을 통해 가족의 의미란 무엇인가 화두를 끊임없이 던지는 작품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가족해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가족의 만찬>은 가족해체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공동체의 연대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 역사적으로 개인의 기본 욕구 충족과 사회화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 급변하는 가치관에 개인주의, 고령화, 저출산, 이혼율 증가 등이 더해져 가족해체 현상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원래 가족해체는 '가족구성원의 상실(사망, 이혼, 별거, 가슴 등)로 인해 가족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의미했는데, 현재는 '가족 공동체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상태'로까지 확대되었다. 예전에는 '함께 밥을 먹으며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문화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최소 단위의 사회적 안전망인 가족이 붕괴되고 있는 동시대에 가족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것은 분명 유의미하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대부분의 주민이 떠난 도시 외곽의 허름한 비닐하우스에 한가족이 살고 있다. 가족의 울타리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미성년 큰딸과 가족보다는 자신이 더 중요한 여동생, 병약한 어린 남동생. 가부장제를 당연시하는 치매 걸린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으며, 알콜중독의 무책임한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오래전 가출한 상태이다. 이 가족의 비극적 아이러니는 가족해체의 중심에 기성세대가 놓여있고, 가족을 통합하는 중심역할을 미성년 자녀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언니는 학교가 끝난 후 10시까지 고깃집 불판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족이 공공시설로 뿔뿔이 흩어져 가족의 끈이 끊어지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가족을 지키려는 이유는 전형적인 장녀콤플렉스에 기인한다. 심리학에 의하면 아이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부모의 사랑을 욕망하는 '의존적 욕구가 있다. 이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오히려 중요한 대상자를 통해 결핍된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데 이를 '허구의 독립'이라고 한다. 주로 부모, 자식, 남편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 성실함, 습관화된 양보 등으로 발현된다. 언니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부재로 인해 결핍된 의존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욕망을 남은 가족에게 투사하고 있다.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책임감을 드러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다. 언니의 현신에 고마워하면서도 결국 가족이 해체될 것을 예상하고 차라리 공공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할 만큼 현실적이다. 파출소에 찾아와서 자신을 혼내지 않는 아버지 그림자 끝자락이라도 붙잡아보려고 비닐에 구멍이 날 때까지 얼마나 쥐어뜯었지만 오지 않는 어머니로 인해 내면의 상처가 크다. 어떻게든 언니에게 힘이 되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부대끼고 "진짜 성공한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하고 일 안해요 우리가 있는지도 모를 걸요."라고 할만큼 현실적 패배감에 익숙하다. 아버지의 방화로 집에 불이 났을 때,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크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는 돈이 필요할 때만 잡에 찾아와 집안을 뒤집어 놓기 일쑤이다. 자신이 삶이 망가진 이유를 가출한 아내에게서 찾으며 책임을 회피한다. "돈에 환장한 년이야. 그년은 돈 벌겠다고 서방질까지 한 년이라고 아들이라고? 아들? 씨발, 그 자식은 씨도 모르는 놈이야. 내 새끼가 아니야! 내가 술 없이 어떻게 버텨. 맨 정신으로 어떻게 살아? 그래. 때렸지. 내가 때렸어! 그년은 맞아도 싸!" 

 

 


큰딸이 비닐하우스에서 쫓겨날 것을 대비해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고 어렵게 준비한 돈까지 훔쳐서 탕진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기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에 불까지 지를 정도로 막장인 인물이다. 할머니는 손녀딸들에게는 욕설을 퍼붓고, 아들과 손자만 끼고 도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신봉자로 현재 치매상태이다. '김 굽는다고 불날 뻔하고, 국에다 소금을 반 통이나 넣어 먹는' 위험한 실수를 자주 저지르기에 동생은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다. 기침소리로만 존재하는 막내아들은 집안의 장손이지만 생사조차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약한 상태이다. 병원비가 많이 들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족 구성원 중 온전히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언니가 유일하다. 하지만 미성년인 언니의 노력만으로 가족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붕괴의 위기 속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위기의 가정 돌보는 일을 하는 주무관은 사회복지시스템 안에서 이 가족에게 맞춤형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의료· 주거지원 등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드디어 이 가족이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깨달은 소회가 인상적이다. "결국 사람이 아닌가... 아무리 시스템이 잘 갖춰지고 제도와 예산이 있어도 그걸 작 동하는 건, 결국엔 사람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 가족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기에 서류상으로는 전혀 문제적 가정이 아니었지만 현실에서는 극단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를 발견하여 복지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결국 시스템이 아닌 사람의 관심과 의지에 달린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불편해서 외면당한 '우리 사회의 어둡고 구석진 곳'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무관의 대사가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강조한다. 
이 작품은 TV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여 사실적인 에피소드와 사전 인터뷰 내레이션이 교차된다. 실제 프로그램 <동행>의 한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받아 오마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관찰자의 시선을 더함으로써 신파에 머무를 수도 있었던 가족의 서사에 객관적 거리를 조성한다. 극한의 가족서사가 정서적인 카타르시스에 머물지 않고, 현실문제로 인식되게 하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다. 작품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 또 반복해서 강조되는 PD의 목소리를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이 강조된다. 
"피디(목소리): 세상엔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믿어봐요 혼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무도 모를거라 생각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아보고 지켜보는 선한 눈들과 불편한 마음들이 많이 있어요" 
사회적 시스템도 분명 중요하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아보고 지켜보는 선한 눈들과 불편한 마음들이 우리 사회의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아닌 목소리를 통해 주제의식을 반복 설명하고, 등장인물이 고유명사가 아 니라 대명사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이 가족의 이야기를 특정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 라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상으로 확장한다. 특별함이 아니라 평범함조차 허락되지 못해 벼랑 끝에 내몰린 수많은 소수자들의 현실까지 확대하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가족의 미래를 예단하고 싶지는 않다. 진짜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무관이나 방송의 관심에서 벗어나서도 이들의 삶이 계속 '평범' 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을 찾아보고 지켜보고, 돌보는 일은 사람의 몸, 결국 우리들의 몫이다.”라는 작품 속 메시지의 올림이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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