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헤롤드 핀터 '덤 웨이터'

clint 2024. 9. 23. 05:40

헤롤드

 

 

 

창문 하나 없고 화장실과 부엌만 있는 지하실에서 벤과 거스는

어떤 조직의 명령으로 누군가를 제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제거할 대상이 누구인지, 왜 제거 되어야만 하는지, 명령을 내린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 그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지 못한다.

다만 이곳으로 들어오는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을 알 뿐

모든 상황은 불확실할 뿐이다. 그들은 그런 불확실한 기다림 속에서

그들이 축구장에 ‘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 문제와 ‘주전자에 불을 켜는 것’과

‘주전자에 불을 붙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 표현인지의 문제로 갈등을 일으킨다.

이 갈등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게임으로 실상은 보이지 않은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벤은 거스의 질문을 전환하거나, 또는 명령과 문답,

질책과 회유,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자신이 상급자임을 확인시킨다.

이에 거스는 집요하게 되묻거나 반복되는 질문 등으로 벤의 권위에 도전하고

지난 임무를 계속 회상하거나 당일 아침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이런 거스의

도전과 의문은 벤을 넘어 조직으로 확대되고 명령자인 윌슨에 대해 불평한다.

이때 알 수 없는 봉투가 문 아래서 들어오고 갑자기 덤 웨이터(요리승강기)가 작동돼

긴장감이 고조된다. 덤 웨이터를 통해 음식을 주문하는 쪽지가 내려오고

벤과 거스는 주문된 음식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을 모두 올려 보낸다.

결국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욕구를 해결할 음식을 남기려는 거스와 그것조차 조직을 위해

희생하려는 벤의 갈등이 희화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계속되는 덤 웨이터의 주문은

거스를 한계에 다다르게 하고 이런 알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벤과 거스의 갈등 속에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마침내 덤 웨이터의 인터폰을 통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드디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러나....

 

 

 

 

 

베케트, 이오네스코, 아라발등과 더불어 현대 연극을 말할 때는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고 문체의 다층적 해석 가능성과 상징적 코드들 그리고 핀터레스크라고 표현되는 핀터만의 극적 분위기는 영국뿐만 아니라 국내의 극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광과 함께 이러한 현대연극의 키워드를 지닌 핀터의 세계를 그에 대한 추모와 더불어 ‘덤 웨이터’라는 작품의 공연을 통해 재조명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반추하고자 한다. ‘덤 웨이터’는 핀터의 작품 가운데 국내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 길이나 규모 면에서 그다지 방대하지는 않다. 하지만 2명 밖에 안 나오는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핀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 가야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덤 웨이터]는 우선 이 작품에 나오는 음식운반용 승강기를 말하며 상징적으로는 이 작품속의 두 주인공인 살인청부업자 벤과 거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채 "멍청하게"(?) 지시대로 남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사람, 또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곤(Estragon)과 블라디머(Vladimir)처럼 미래에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않을 수도 있는 지극히 불확실한 어떤 일,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상을 막연하게 기다리느라고 현재를 헛되이 낭비하는 "멍청한"(?) 사람, 벙어리 하수인, 자신의 의견이 없고 있더라도 이를 분명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꼭두각시처럼 남이 시키는 일만 아무런 의심이나 불만없이 수걱수걱 해내는 사람을 의미한다. 평론가 Quigley의 논리에 의하면 Harold Pinter의 The Dumb Waiter에서의 관심사는 이 극의 마지막 정지장면에서 이미 결론이 나있는 셈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것 같다. 이 마지막 장면은 총소리나 치켜든 총구를 밑으로 내리는 Ben의 동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Ben과 Gus가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 노려보는 상황으로 인해서 극적인 크라이막스에 도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Gus가 결국에는 살해당할 것이라는 전제아래 이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흥미는 있을지 모르나 쓸데없는 억측에 그치고 말 것이다. 연극은 이미 끝나버렸다. 그렇다면, [Ben이 Gus를 죽이느냐?]라는 고식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애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극의 결말부분에서 두사람이 오랫동안 서로 쳐다보는 시선속에는 어떤 종류의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냐라는 질문을 해야 옳을 것이다. Ben과 Gus 두사람이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 쳐다보는 순간들은 이에 앞서 전개되는 두사람간의 인간관계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 전혀 아니다. 이 연극은 실제로 두 인물이 서로 쳐다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Gus는 안절부절하며 신문을 읽고 있는 Ben에게 무슨 말을 할듯말듯 자꾸 그를 쳐다본다. Ben은 신문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구두를 벗고 그 속에서 성냥과 담배갑을 꺼집어 내는 Gus를 쳐다보며 시간이 흐를수록 짜증스런 기색을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낸다. 이 이후로 대본에는 "벤은 거스를 노려본다."라거나 "그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또는 "그들은 서로 노려본다." 등등 두 극중인물간의 눈싸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지문이 적어도 열댓개이상 나온다. 그러므로 막이 내려 가기 직전에 두 인물이 벌이는 최종적인 눈싸움은 이미 충분한 사전 준비를 거쳐서 일어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과연 Ben이 Gus를 죽일것인가?]라는 점이 아니라 마지막 눈싸움이 이처럼 치밀하게 사전에 준비된 것이라면 이것이 이 희곡 전체의 구성상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되풀이되는 눈싸움의 극적기능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게 말할 수있는 한가지 사실은 이러한 눈싸움이 불안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Ben과 Gus가 취하는 우유부단하고 매우 어정쩡한 태도를 나타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점에는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첫째, 눈싸움이 극의 시작부터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극의 시작부터 또는 극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두사람의 관계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내재해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증거라는 점이다. 둘째로는, 이것이 일방적이 아닌 쌍방간의 눈싸움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작품을 충분히 제대로 해석하자면 간과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쳐다보기보다는 쌍방이 서로 마주 쳐다보며 눈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은 이 극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특히 마지막 停止 장면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Gus만이 지닌 일방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Ben도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는 쌍방적인 문제들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극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일련의 괴이한 사건들에 대해 극중인물들이 취하는 반응을 실제로 살펴보면, 극중의 문제가 두 인물들중의 어느 한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두사람 모두의 문제라는 점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중 첫번째 사건-- 즉, 수세식 화장실의 변기가 제멋대로 엉뚱하게 작동하는 사건--에 대해 두사람이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대조적인 차이는 이처럼 매우 사소한 상황에 대해서 두사람이 보여주는 서로 매우 대조적인 반응을 통해서 앞으로 전개되는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상황들에 이들이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똑같은 대조적인 차이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해롤드 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