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나이토 유코 '가타부이, 1972'

clint 2024. 8. 8. 15:55

 

 

'오키나와'라는 하나의 테마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독특한 문화를 가진 리조트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당시 전쟁으로 오키나와 주민의 4분의 1이 희생되었다는 통계만으로도 혹독한 전쟁이 남긴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후에 오키나와는 27년 동안 미군 지배를 받게 된다. 과거 독립국이었던 류큐 왕국(1429~1879)이 일본에 흡수되고 미군 통치를 받는 등, 1972년 일본에 반환되기까지 역사적으로 수차례나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1972년 일본 반환 이후로도 오키나와에 산적된 문제 해소되지 않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반환이 후 미군기지 없는 평화로운 오키나와를 기대했지만 그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키나와 반환 이후 그 수는 더욱 증가하여, 현재 일본 전체의 70퍼센트에 달하는 미군 전용시설이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희곡 <가타부이, 1972>의 본문에 등장하는 '버림돌(사석(死石)'이란 단어가 상징하듯이. 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는 일본본토의 지상전투를 미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되었고 패전 이후에는 미군에게 넘겨졌으며 반환 이후에도 불합리한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환과 이전을 둘러싸고 여전히 대립과 논쟁이 계속 되고 있다

<가타부이, 1972>는 이런 오키나와를 테마로 1972년의 오키나와 반환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맞이했는지 상상해보는 작품이다. 총리와 일왕, 오키나와 지사가 실제로 발언했던 축사가 희곡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배치되어 반환당시의 상황을 현실감 있게 소환한다. 사탕수수 농가인 세이지 가족을 중심으로 도쿄의 대학생인 스기우라, 술집에서 일하는 유미라는 여성이 등장해 잊어서는 안 될 오키나와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오키나와를 둘러싼 현실의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이 작품은 3부작으로 기획된 오키나와 일본반환 50주년 기념 공연의 제1탄으로 2022년에 공연되었다. 2024년에 제2 <가타부이, 1995>, 2025년에는 제3 <가타부이, 2025>가 공연 예정이다.

 

 

한 가족을 통해 담아내는 역사와 현실

근대 이전에는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 지역에는 오키나와 특유의 문화가 존재하고, 그 기후는 일본 본토와는 달리 아열대에 속한다. 특히 미국의 지배를 받던 27년 동안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본 본토인들에게 오키나와는 낯선 지역이었을 것이다. 극 중 도쿄에서 온 스기우라는 무의식적으로 '일본'이라는 단어를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다. 또한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말이 아닌 영어만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친구 얘기를 꺼내는데, 이런 스기우라의 발언에서 당시 일본인들이 가진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 처음 온 스기우리에게 무엇보다 낯설었던 것은 너무 자주 귀에 들어오는 B52 폭격기의 소음이었다. 그 소음에 세이지를 포함 오키나와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폭격기의 소음이 시끄럽다며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스기우라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오키나와의 극작가로 미군 기지 근처에 살고 있는 가네시마 다쿠야는 어느 잡지에서 자신의 집이 일상적인 전투기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고 적었다. 자신은 그 전투기 소음을 그다지 인식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최근 자신의 어린 아들이 앙증맞은 얼굴로 전투기 소리를 흉내 내는 걸 보고, 이후로는 아들이 흉내 내는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전투기 소음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미군기지 근처에 거주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현실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중 하나인 가데나 비행장 바로 근처에는 소음측정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전투기의 소음은 66.1데시벨 정도가 가장 많았고 최대 소음은 117데시벨 정도였다고 한다. 그 소음 측정결과를 발표한 <오키나와 타임스(2023 9 23일자 기사> 110데시벨 이상은 청각 장애를 일으킬 만한 소음이라고 전하고 있다. 최신 전투기의 소음은 예선 B52 폭격기에 비하면 크지 않다고 하지만 일 상생활에 지장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가타이, 1972> 공연에서 폭격기 B52의 굉음은 그 장소의 모든 소리를 지워 버릴 듯한 거대한 소음으로 표현되었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나이토 유코는 수도권 출신으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위해 오키나와에 처음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다. 스기우리가 폭격기를 향해 외치는 고함은 오키나와 출신이 아닌 외부자로서 느낀 작가의 분노가 등장인물을 통해 표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이었던 불합리한 상황에 스기우라가 분노를 표출해주었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세이지의 사위 노부오는 같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돌을 맞으면서도 미군기지 건설에 가담했고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미군 편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괴롭고 죄송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노부오의 말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처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현실을 드러내면서 오키나와를 둘러싼 문제들이 가해자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는 풀어낼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오키나와를 둘러싸고 수많은 의견과 대립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 작품은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편향되지 않은 다양한 논점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여성 인물의 서사

<가타부이, 1972>에는 세 명의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세이지의 딸이자 학교 교사인 가즈코는 오키나와 반환운동의 활동가이기도 하다. 반환이 결정된 이후에는 기지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키나와가 반환되면 안 된다며, 반환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가즈코의 딸인 메구미는 도쿄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힘없는 오키나와를 외면하는 일본정부를 비난하면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유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어머니의 위선적인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학생 집회에서 오키나와 문제에 열을 올리던 자신의 모습이 어머니의 영향임을 잘 알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오키나와 출신이면서 도쿄에서 대학공부를 한 교육받은 여성들이다. 당시 오키나와에서 가즈코처럼 오키나와의 정치적 문제나 복지문제 등에 관여하는 교사들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오키나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유미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전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친절한 세이지의 도움으로 세이지의 집에서 사탕수수 수확을 도우며 신세를 지게 된다. 미군의 통치를 받고 있던 오키나와에는 유미와 같이 '몸으로 때우는 일', 즉 매춘행위를 하거나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에 기지촌 여성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전쟁 이후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오키나와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성 산업에 내몰려야 했다. 이런 여성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은 극 속 가즈코의 반응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가즈코는 아비지인 세이지가 유미와 남녀관계로 엮이는 걸 걱정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나이 어린 술집 여자와 같은 집에 산다는 걸 딸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그런 딸의 입장보다는 유미가 술집 종업원'이라 는 사실이 이미 학교 관계자에게까지 퍼진 것에 가즈코는 거부감을 표출한다. 결국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유미는 가즈코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자발적으로 세이지의 집을 떠난다. 전남편의 폭력에 시 달리다 집을 나온 유미는 보호자와도 같던 세이지라는 울타리를 잃고 결국엔 전남편에게 살해당한다. 유미의 죽음은 오키나와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극의 비극성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타부이, 1972>가 오키나와를 마주하는 방식

세이지의 집을 떠나기 전, 유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어준 세이지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세이지와 유미의 관계는 극 초반에는 남녀 관계로 엮여 있다고 생각할 만한 여지를 주는데 극중후반에 세이지는 유미가 우리 집 아이나 마찬가지"라며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녀 관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성에서 작가의 포용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유미의 죽음 이후, 유미를 구하기 위해서는 유미와 마찬가지로 힘없는 사람이었던 그녀의 전남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다고 말하는 세이지의 발언은 인류애적인 가치관과도 연결된다.

세이지는 기지 반대 집회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풀이 죽어있는 스기우라에게 '폭격기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사탕수수 수확을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주눅들 필요 없다'고 다독인다. 아열대 기후에서 내리는 소나기를 의미하는 '가타부이'는 한쪽에서는 먹구름에 엄청난 비가 내리는데 다른 한쪽은 맑게 갠 화창한 날씨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오키나와를 몸소 체험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가능한 일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스기우라처럼, 한쪽에서 내리는 비를 그냥 보고만 있지 말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을 걸어온다.

 

 

 

작가 나이토 유코

(內藤裕子, 1975~) 극작가, 연출가다. 극단 '연극집단 엔' 연출부 소속이자 극단 'green flowers' 창립멤버다. 면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집필한다. 온기 어린 시선으로 그려 내는 가족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테마를 담아내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