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안민수 재구성 '리어왕'

clint 2024. 8. 5. 11:49

 

 

「리어왕」 공연에 붇여 - 여석기 교수
셰익스피어 극 공연의 역사는 4백년 정도로 길다. 따라서 그 숱한 작품들의 공연기록에는 여러 우여곡절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마 가장 많은 곡절을 겪었던 작품이 「리어왕」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약 1세기반, 정확하게 말해서 1681년부터 1838년에 이르는 동안 단 한번도 세익스피어의 원작대로 상연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으로서 읽힐 때는 원작에 따르면서 무대 위에서 공연될 때는 다른 제작자, 각색자의 손을 빌린 (물론 이 경우에 작가의 승낙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것도 이만저만 뜯어 고친 것이 아닌 작품을 보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할 때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 개정판이 네이험 테이트란 사람에 의한 것인데 그는 리어王과 코딜리어를 결말에 가서 살려놓고 코딜리어를 에드가와 결혼시킴으로서 어김없는 낭만 멜로드라마로 바꿔버렸는데 우리는 최소한 그런 당시의 관객들 취향에 맞아들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이것이 157년동안이나 받아 들여졌겠느냐 말이다. 뿐만 아니다. 세익스피어의 진수를 아마 가장 잘 이해한 사람중의 하나인 찰즈 램은 '리어왕'을 두고 「연기될 수 없는 역」이라고 단정했으며 무대 위에서의 폭풍우장면(3막)을 도저히 직시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역시 우수한 세익스피어 학자의 하나인 부레들리도 은근히 찬동했음인지 「리어왕」은 위대한 작품이나 "무대에 올리기에는 너무나 장대하다"고 평했다. 현대에 와서도 중론은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중 이 작품을 가장 공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공연 회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1931년 이후 30년간에 런던 및 스트렛포드의 두 군데서만 19번의 각기 다른 공연이 있었고 그중에는 아주 뛰어난 리어왕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1940년의 존 길거드의 리어王(올림포스的 장관)에서 1962년의 실존본주의인 폴 스코필드의 리어王(피터 브루크의 독창적 해법에 의한)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리어왕>은 단순히 그 役을 솜씨 있게 처리했다든가 연기가 뛰어났다든가 하는 점에서 만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해석」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경우를 볼 수 있고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많은 공연에서 그렇듯이 수없이 되풀이 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연에 큰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피터 브루크의 말마따나 「리어왕」은 일찍이 아무도 그 정상에 올라가 보지 못한 山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산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던 등반자들 틈에 끼여 또 한번 피나는 노력과 새로운 시도의 좋은 본보기로서 이번 공연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맹인과 광인과 광대와 - 안민수 (재구성및 연출)
"人生은 하나의 커다란 무대이며 인간은 모두가 광대이다." 불행한 것은 우리의 意思와 관계없이 이 舞台 위에 던져졌다가 예고없이 불려가는 일이며 광대로서 충실하면서도 자기가 광대인줄 모르는 바보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처음으로 이 세상 공기를 마실 때 바보들로만 가득 찬 이 큰 무대에 나오는 것이 서글퍼서 우리는 울어댄다」 「리어왕」의 세계는 이 무수한 「바보들」 세계의 축소판이며 거기엔 「힘」을 위한 「힘」의 투쟁과 갈등이 곧 행동(Action)이며 그것은 劇中劇으로서만 보여진다. 세상이 그러하듯이 「리어왕」에는 자기가 「바보」인줄 모르고 딴으로는 自己 의지로서 충실히 行動한다고 믿는 「가짜 바보」의 무리와 처음부터 「바보」인줄 알면서 나는 「바보」라고 행세하는 「진짜 바보」가 있다. 삼척동자도 그르치지 않을 사리를 잘못 판단하여 비극의 씨를 만드는 「리어」나 「글로스터」그리고 「에드가」의 경우, 또는 제딴으로는 열심히 그리고 충실히 자기 의사를 펴서 뛰었다고 믿는 「거너릴」 「리이건」 「에드먼드」나 「올버니」의 무리도 결국은 연출당한 배우이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짜 바보」에 속한다. 어쩌면 이 「바보」들의 놀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을 법한 「광대 바보」만이 유일한 「진짜 바보」이며 따라서 오직 그만이 自己의 등퇴장의 時期를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을 任意대로 定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가짜바보」도 「진짜바보」의 世界에 닿을 수 있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미친 톰 「에드가」의 세계이고 눈먼 장님 「글로스터」의 경지이며 그것은 무서운 人間의 祭物로 해서만 얻어지는 고행의 길이다. 딸들에게 집을 쫒겨난 「리어」는 맨 머리로 황야의 폭풍우와 싸워서 「미친 톰」을 만나며 그리고는 이내 미처버리고 마는데 도달한 곳은 바로 「철학자의 世界」이다. 그는 미치고서야 비로서 이치에 맞는 말을 중얼거리지 않는가? 自身이 만든 불륜의 씨에 의해 悲劇의 수렁에 떨어진 「글로스터」 또한 두 눈을 잃고서야 비로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환히 보게 된다. 이 길에 도달하는 것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 험준한 길이며 「미친놈」이 「눈먼장님」을 인도하여 올라가는 저주의 길이다. 그렇게 도달하여 본곳은 다름 아닌 「바보 광대」의 世界와 맞바로 통하는 세계가 아닌가. 그것은 곧바로 부조리의 世界이며 이 부조리의 世界는 喜悲가 교차하는 그로테스크의 무대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리어왕」은 세익스피어 비극중에서도 논리 위에 가장 큰 矛盾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비추인다. 그것은 시의 그로테스크  世界이며 무리한 얘기 전개와 가장으로서만 얘기의 전개가 가능한 것은 곧 바로 부조리의 世界와 통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내용에 맞는 극의 形式에 관해 곳곳에 암시를 주고 있다. 평지를 오가면서 준험한 산을 오른다고 한다든가 필경은 「리어」라는 옛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때로 장면 전환 끝에 「광대 바보」가 인용하는 우스개 소리는 이야기 發展과는 전혀 관계 없는 「바보」 자신의 개인감정 표시이거나 혹은 공연 당대 관객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뚱딴지 같은 풍자적 대사를 지껄여댄다. 이것은 이 연극이 언제 어느 곳에서 공연된던 그때의 流行에 맞게 처리하라는 뜻이며 또한 극 전체의 형식을 암시해주는 것으로 나는 받아 들였다. 그러나 연극의 형식에 관한한 결코 자의적인 작업은 아니며 새로운 형식이나 내용을 향한 몸부림은 더더구나 아니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기분날 때 등장하여 "난 점심 때 자러간다"고 외치며 퇴장하는 「바보」의 世界에 가슴이 미어져. 그놈이 도대체 몇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초보적 의문은 이내 광대와 맹인과 광인의 함수관계에 흥미로 발전하고 그들이 하고 있을 법한 「리어왕」의 世界를 추구해 보게 되었다. 드디어는 그에게 연습을 시키게 하고, 그로 하여금 막을 올리고 닫게 했으며 그가 필요한 무대와 조명과 의상을 주려고 했다. 오직 내 作家 자신의 의식世界이며 오늘에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충실해 보려고 한 것 뿐이다